주말에 비가 쏟아지더니 하늘이 더 높아졌다. 그림자는 더 투명해지고 먼 산의 산등성이에서는 노린내가 난다. 가을로 가는 색채의 신열이 등성이를 노린내로 채우고 있다. 10월이 깊어지면서 저 색채의 붉은 노린내는 활활 타 오르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 향기에 취해서 산을 헤맬 것이다.
강릉에는 예부터 관(官)의 노비들이 놀던 가면극이 있었다. 그 말을 줄여서 ‘강릉관노가면극’이라 불렀다. 이 극의 유래는 세월의 더께를 잴 수 없을 만큼 두껍다. 고대 강릉은 기원전부터 성읍국가인 예맥족의 예국(濊國)이 있던 지역이다. 예국에 무천(舞天)이라 하는 추수감사제가 있었는바, 옛 기록에 “常用十月祭天晝夜飮酒歌舞名之舞天” 즉,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췄는데 이를 무천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 강릉관노가면극은 지금까지 무탈하게 이어진다. 구본창은 어느 해 그 가면극을 사진으로 박아야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다만 탈이 아니라 그 탈을 쓴 모양새 그대로 탈놀음 광대의 모습까지 담아야겠다고 말이다.
2006년 7월에 한길아트에서 책으로 묶었으니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겠으나, 그는 탈의 형상과 탈 쓴 광대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영험의 순간을 보았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의 탈 사진 작품들은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기이하다.
“나에게 탈은 박제된 나비나 물고기들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죽어있고 생명이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군가 그 탈을 얼굴에 뒤집어쓰는 순간 생명이 부여되는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한국의 탈을 들여다보면서 그 공허하게 뚫린 눈빛에서 특별한 기운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꼼꼼하고 정교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끄적거린 듯해서 수더분하고 어설프게 만들어진 손맛 같은 거지요.”
사진은 단 하나의 색으로 이뤄졌다. 하얀 달밤의 묵묵한 침묵과 속살 서늘한 그림자처럼 색은 흐릿한 어둠에 휩싸여 있다. 그 어둠이라는 것이 실상은 거대한 광목천이 아닐까 하는데, 극판이 벌어지면 빛 가리개나 배경막, 숨김막, 가름막 등으로 쓰이는 막이었을 게 분명한다. 그런 그림자 막을 배경으로 가면 쓴 광대가 서 있다. 시시딱딱이다.
‘시시’는 입소리 ‘쉬쉬~’에서 딴 말로 잡귀를 쫓는 소리다. ‘딱딱이’는 탈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러니 시시딱딱이란 잡귀를 쫓는 탈광대다. 얼굴은 다섯 색으로 칠했고 칼자국이 선명하다. 더군다나 칼을 들고 가세치기 춤을 추니 그 모습이 가히 섬뜩하기 그지없다. 가면극에서 시시딱딱이는 양반광대와 대립하고 소매각시를 놓고 갈등을 보여주지만, 한 여름철 홍역을 예방하는 여역신이기도 했다.
10월이다. 하늘을 높게 우러르며 간간이 삶의 축제에 참여할 일이며 또한 질병을 이겨 건강을 지킬 일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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