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위한 ‘라디오 드라마’… 어~흥! 편견의 벽 물렀거라
극단 ‘책을 읽어주는 사람들’(이하 책읽사)의 대표 정재갑씨의 말이다. 책읽사는 책을 극본화해 성우들이 직접 들려주는 낭독 전문 공연팀이다. 책읽사의 활동 제1기준이 ‘돈’에서 ‘나눔과 공유’로 변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공자와 수혜자, 함께 ‘부자’ 되는 문화이용권
지난 14일 오전 11시 장애 아동을 위한 보육시설 큰나무 희망 어린이집(파주시 다율동).
0~10세 지적ㆍ지체 장애아 40여 명과 교사, 학부모 등 서로 익히 얼굴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극단 책읽사의 대표이자 책의 극화 작업을 담당하는 정재갑씨를 비롯해 전문 성우 3인방이 그들이다.
책읽사는 지난 2008년 시각적 자극을 배제한 소리극을 공연하는 전문 극단으로 창단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화려한 시각 문화에 익숙한 시대에, 즉흥적 반응과 사고가 자연스러운 시대에 ‘반기를 든’ 극단이다. 창단 의도는 그랬다.
이후 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 청소년을 주 대상으로 공연했다. 교육이 주목적이었다. 눈에 자극을 주는 일체의 이미지 없이 성우의 목소리와 각종 음향효과로만 이야기를 들려준다. ‘라디오 드라마’를 연상하면 쉽다. 청취자들은 목소리를 따라 각기 다른 상상의 세계로 떠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장애인으로 청취자(관객) 폭을 넓혔다. 경기문화재단이 문화적 소외계층에 향유 기회를 제공하고자 진행하는 문화이용권(구 문화바우처)을 통해서다. 사업명은 ‘장애인을 찾아가는 소리극 낭독콘서트’.
책읽사는 지난 2012년 문화이용권의 공모사업 ‘가가호호’에 선정돼 총 11회에 걸쳐 경기도내 시각장애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가호호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문화생활이 어려운 도민을 선정된 10개 예술단체가 직접 찾아가는 사업이다.
책읽사는 노인에게는 효와 관련된 소설을, 청소년에게는 희망을 일깨우는 소설을, 어린이들에게는 동화를 최소 30분에서 1시간가량 낭독했다.
“나에게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는 것과 소리극이 문화적 욕구는 높지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의 감성적 영역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이 두 가지를 깊이 깨달았어요. 이때부터 극단 운영 방침에 변화가 생겼죠. 항상 금전적 기준이 먼저였는데, 우리를 반겨주고 놀라운 감성적 변화를 보여주는 장애인 청취자를 통해 더 큰 가치를 찾은거죠.”
책읽사는 지난해에 이어 경기문화재단 문화이용권 가가호호의 2013년 예술 단체로 선정됐다. 올해에는 공연 횟수를 15회로 늘렸다. 책읽사를 만난 파주시의 큰나무 희망 어린이집 역시 그 중 하나다.
이날 이들은 지적ㆍ지체 장애아동에게 동화 ‘팥죽 할멈과 호랑이’와 ‘강아지똥’을 들려줬다. 집중력이 낮은 어린이인 만큼 공연 시간은 30분. 이해력을 높이려고 이례적으로 동화책 이미지를 함께 보여줬다.
선생님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은 산만했지만, 성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에 금세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줬다.
첫 소리극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할머니가 팥죽을 얻어먹은 알밤, 자라, 물찌똥, 송곳 등의 도움으로 호랑이를 물리치는 옛 이야기다.
아이들은 실감 나는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에 즉각 반응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는 기우였다.
“지적 장애아동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이제 없다. 아이들은 나름의 세계에서 스스로 해석하고 즐기며, 그 장면은 매번 정말 놀랍다.”
실제로 아이들은 호랑이가 등장해 ‘어~흥!’하며 울부짖는 장면에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질렀다. 거꾸로 호랑이가 할머니에게 당하는 장면에선 손뼉 치고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이어 쓸모없는 강아지똥이 민들레 꽃을 피워내는 소중한 거름이 되는 ‘강아지똥’ 소리극이 이어졌다.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는 잔잔한 동화에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이날 책읽사는 두 편의 소리극을 들으며 아이들이 보여준 집중력과 호응에 계획에 없던 앙코르 공연 ‘오리와 부엉이’를 들려줬다.
박금례 큰나무 희망 어린이집 교사는 “책으로만 보던 동화를 전문가들의 실감 나는 목소리로 들으니 더 좋아하고 집중하는 것 같다”며 “사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를 선정해 공연한다면 이해도와 몰입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편 정 대표는 “소규모 장애인 시설에 가가호호 사업을 홍보하며 낭독극 신청을 독려하면 오히려 과거 무료 공연이라면서 피해를 당하였던 상처 때문에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며 “좀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문화이용권 사업에 대한 홍보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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