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다. 설악산 내장산 한라산이 아니더라도 내 집 앞 칠보산 단풍도 곱고 아파트 화단도 붉다. 아침 출근길에 흩날리는 가로수 잎들에서도 가을이 흐른다. 하늘은 어느 사이 높이 돋아서 공간감의 극치를 이룬다.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크고 큰 호수의 심연에 있는 느낌이다. 투명한 물밑에 어리는 물 밖 하늘 풍경과 세월과 삶의 흔적들처럼.
가을이 깊고 겨울에 다가설수록 센티멘털해 지는 마음과 나목(裸木) 같은 삶은 신산하다. 가을 끝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옛 사람들은 왜 세월은 쌓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이해균의 작품들도 겨울 나목에 쌓인 세월과 같다.
그의 작품들에서 봄의 햇살이나 생의 활기로 가득한 여름을 찾는 일은 부질없다. 애당초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듯 그는 고집스럽게 쇠락하는 것들의 뒷풍경을 좇아왔다. 그래서 그 풍경들에서는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구덩이가 많아/ 그 차가운 존재들을 뛰어넘고 넘어서만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추워지려는 것이다/ … 이 천지간의 물결들을 최선들을 비벼대서/ 숨결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이병률, 「뒷모습」)의 향취가 묻어난다.
그는 최근 작품들 전부에다 ‘응혈의 꿈’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응혈(凝血)은 피의 응고현상으로 의학용어지만, 그는 ‘피의 응고’라는 생체적 상징을 미학적 상징으로 바꾸어서 창작방법론으로 숙성시켰다. 응혈은 이런 것들이다.
작품 표면들이 고운 백사장의 모래결이 아니라 화전민들이 가꾸는 산등성이 화전밭처럼 거친 것, 캔버스나 하드보드지에 검은 밑바탕을 초벌한 뒤에도 긁고 칠하고 덧칠하기를 반복하는 것, 여러 바탕색들의 색덩이가 색층을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종국에는 푸른색으로 마감되는 것, 수년 째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전국 산천을 찾아 이미지를 채집하듯 그의 풍경은 기억에 쌓인 이미지의 퇴적층이라는 것. 그러므로 두텁게 쌓인 세월의 풍적(風積), 검은 바탕 검은 물밑의 풍적토(風積土)로서 그의 미학을 ‘풍적의 미학’이라 해야 마땅하다.
그것들의 실체는? “저 풍경들은 사라지는 옛 도시들, 살아남으려는 안간힘, 저 풍경들은 그림자, 그림자마저 상실한 피안, 저 풍경들은 존재하지 않는 리얼리티, 저 풍경들은 쌓이고 쌓인 세월의 덫, 하얀 달빛 달무리, 저 풍경들은 앞으로 갔다가 뒤로 멀어지는 미래, 저수지에 가라앉은 수몰지.”이다.(김종길, 「내 몸은…」)
그렇다면 ‘응혈의 꿈’에서 ‘꿈’은 무엇일까? 그가 붓의 힘으로 부여잡고 있는 풍경의 뿌리일 것이다. 뿌리를 잃는 것은 꿈의 상실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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