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이윤엽의 ‘여기 사람이 있다’

20일 새벽이었습니다. 누군가 페이스북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사진을 오렸습니다. 사진을 확대해 또박또박 소리 내서 읽었습니다. 파란 색 매직으로 밑줄 친 부분들은 좀 더 크게 읽었죠. 첫 장 하단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를 읽고 난 뒤, 두 번째 장부터는 눈으로만 읽었습니다. “97~98년 IMF 이후 영문도 모른 채 맞벌이로 빈 집을 지키고, 매 수능일 전후하여 자살하는 적잖은 학생들에 대해 침묵하길, 무관심하길 강요받은 것이 우리 세대 아닌가요?”라고 묻는 장면에서는 잠시 쉬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장의 철도 민영화 이야기나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치켜들었던 ‘노동법’에서의 파업권 이야기,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한 언급보다도 침묵과 무관심을 강요받았다는 이야기에 눈시울이 아파왔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IMF 이후 15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1998년 봄의 약속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 정치인들은 IMF 구제 금융에 따른 구조조정과 긴축재정이 끝나고 나면 더 좋은 사회, 건강한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 없이 백수로 견뎌야 했고 어른들조차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 시간은 참으로 느리게 흘렀습니다. 3년이 지나고 구제 금융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곧 일터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일터도 새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기업은 더 가혹하게 성과를 따졌고 쉽게 기업을 팔아 해치웠으며, 공공기관들은 민영화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순간들에서 누군가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따듯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대들의 형으로 나 또한 어려운 그 시대를 견뎌왔지만, 그래도 미안합니다. 88만원 세대라고 딱 꼬집어 내는 재주는 있어도 그것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 선배들이 미안합니다. IMF의 힘든 시기를 민주주의의 연대로 더 크게 성숙시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IMF에서 일자리 잃은 분들의 노동조건을 더 나은 상태로 되돌려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 때 되돌리지 못한 결과가 고스란히 지금 그대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대들과 모인 자리에서 내 말만 내 주장만 던져서 미안합니다. 그대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말의 위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대들이 대자보 앞에 섰을 때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판화가 이윤엽도 그런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데에는 “여기 사람이 있다”는 소리이니까요. 고맙습니다. 그대가 있어서 내가 안녕한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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