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조소희의 리스트비얀카

조소희의 ‘리스트비얀카’라는 작품을 봅니다. 이르쿠츠크 리스트비얀카는 바이칼 호수의 작은 항구도시이자 한민족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지요. 지난 해 작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그곳을 찾았다고 하는데, 리스트비얀카로 에둘러가는 바이칼 호숫가에서 그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고 해요.

그는 숙소에서 그가 본 나무를 찾아 아침 일찍 길을 나섰어요. 5시간 아니 6시간 가까이를 걸어가서 다시 그 나무와 조우한 뒤에 그가 한 행위는 나뭇가지에 잇대어서 붉은 실로 실뜨기하는 것이었답니다. 그가 초원을 달리는 작은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본 그 나무를 만나기 위해 걸어야 했던 시간들과, 그 나무와 더불어 실뜨기했던 순간들은 그저 한 나무와 한 작가의 이야기로 간단히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언가 다른 이야기가 있을 거에요.

그 나무는 바이칼 호수의 초원에 홀로 서 있는 한 그루 침엽수입니다. 몽골 유목민들은 이와 같은 나무들을 곧잘 무당나무라 부르기도 해요. 특히 이 나무처럼 나무 위쪽에 가지가 무성한 것을 ‘위 하늘의 무당나무’라고 하지요. 상계(上界)를 상징하는 이 나무는 그래서 순수하고 순결하며 슬픔이 없는 세상을 뜻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수호신과 같은 선신(善神)이 존재하는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랍니다. 그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실을 이어 붙여서 하계(下界)로 내려에게 하고 있죠.

실뜨기라는 예술적 행위에 앞서서 따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걷기’일 거에요. 그는 초원을 걷고 또 걸어서 나무를 찾아가는데 그 과정이 그 자체로 예술적 행위가 아닐까요? 순전히, 한 사람이 걷기만을 위해 걸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걷기에는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철학적 깊이가 있다고도 생각해 봅시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의 걷기와 걷기의 무게에 담긴 철학적 깊이는 무엇일까요?

걷기는 집의 반대라고 하더군요.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라는 것이죠. 우연히 어딘가를 향해 내딛는 걸음걸음이 한 인간을 떠돌이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실처럼 뻗어간 길, 오솔길처럼 꾸불거리는 선(線)의 한 과정에 불과할지도 모르구요. 생각의 풍요는 그런 걷기에서 출발하지요. 걷다보면,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나는 손으로만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내 발도 항상 한 몫을 차지합니다. 발은 들판을 가로지르거나 종이 위를 걸어서 횡단합니다. 언덕을 올라가서 풍경을 보세요. 그러면 길에도 근육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