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홍성담의 ‘제주 4.3 고’

4월입니다. 매화, 동백,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이 전국을 수놓고 있습니다. 올해 봄꽃은 조금씩 일러서 지역 봄꽃축제를 기획하는 분들은 울상입니다. 저는 주말동안 남쪽바다의 동백에서 집 앞 보랏빛 목련까지 꽃구경을 다녔습니다. 이런 황홀경이 따로 있을 수 없어요.

내일 목요일이면 제주 4.3항쟁 66주년입니다. 66주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은 모두 알고 계시지요? 화해와 상생을 위한 큰 역사적 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4.3의 유족 분들이 마음 졸이며 제대로 된 제사조차 올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큰 위안이겠지요.

최근 홍성담 작가는 ‘제주 4.3 고’라는 작품을 완성했어요. 가로길이가 4미터나 되는 대작으로 말이지요. 작품의 첫 인상은 어둡고 우울하며 심지어는 무섭기까지 합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서로 죽이고 죽는 상황 속에 처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죽고 죽이는 것이 상황이 풀리지 않는 악순환의 인연처럼 꼬여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화면의 구성방식과 색조가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으로, 과거 속의 환영으로 못 박혀 있으니 더더욱 침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홍성담은 우리에게 그런 풀리지 않는 역사적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주 4.3 고’의 ‘고’는 씻김굿에서 고풀이할 때 사용하는 무구(巫具)입니다. 기다란 천이나 줄을 둥글게 매듭짓는 것을 고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림 속의 흰 줄은 그래서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묶여있습니다만, 알고 보면 그 묶인 천이 바로 ‘고’이기 때문이죠. 화면 중앙을 보시면, 한 여성이 ‘고’를 잡고 지긋이 눈을 감고 있습니다. 샤먼입니다. 그녀는 이제 이 줄을 풀어 죽은 자 죽인 자 모두를 위한 씻김굿을 펼칠 것입니다.

홍성담은 광주 5.18민주항쟁으로부터 공동체 신명의 미학과 샤먼 리얼리즘의 미학을 궁구해 온 작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2005년부터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를 미학적 테제로 실험하기도 하고, 오키나와, 타이완, 제주를 오가며 동아시아 세 섬의 평화적 연대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젊은 작가들과 4.3유적지를 답사하면서 광주와 제주만이 아니라 20세기 아시아의 슬픈 영령들을 위한 미학적 굿판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품 ‘제주 4.3 고’는 제주 4.3을 빌어 해원하는 씻김굿입니다. 그는 이 작품 앞에서 스스로 씻김굿을 펼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4.3이 지나면 4.19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4월 봄꽃은 환한 생명의 꽃이면서 혁명의 꽃입니다. 나를 나의 내부로부터 새롭게 변화시키는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길 빕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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