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매뉴얼

이연섭 논설위원 yslee@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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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안전에 관한한 완전한 후진국이다.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후진국형 인재(人災)가 수십년째 계속되고 있다. 292명의 사망자를 낸 서해훼리호 침몰(1993년), 32명이 숨진 성수대교 붕괴(1994년), 502명의 목숨을 앗아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192명이 숨진 대구지하철 가스폭발(2003년). 그리고 올해 2월 10명이 목숨을 잃은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붕괴, 4월엔 304명의 사망자 및 실종자를 낸 세월호 침몰까지 끔찍한 참사가 끊이지 않고있다.

서울시는 삼풍사고 백서에서 “대형참사 때마다 지적돼 온 비상구조체계의 문제점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노출됐다”고 지적했다. 또 “소방, 군부대, 경찰 등에 대한 통합 지휘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역할 분담이나 책임 한계가 불분명했다. 이런 혼선은 사고 수습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다”고 적고있다.

전라북도는 서해훼리호 침몰 백서에서 “승선인원의 철저한 확인과 승선인원 통제가 있어야 했다. 감독을 소홀히 한 당국의 과실이 크다”고 밝혔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지적된 문제점들이다. 사고가 날 때마다 정부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재발방지책을 앞다퉈 발표했지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세월호 사고 후 제대로 된 재난대응 매뉴얼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매뉴얼은 많다. 정부 매뉴얼만 3천200여개에 달한다.

하지만 실효성은 낙제점이다. 재난대응 매뉴얼이 있어도 이를 숙지하고 현장에서 제대로 판단해 행동하는 사람도 시스템도 없다. “3천개가 넘는 위기관리 매뉴얼이 있지만 현장에서 내용을 잘 모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의 재난대응 매뉴얼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매뉴얼에 현실성을 불어넣고 매뉴얼을 운용하는 인력을 전문화해야 한다.

매뉴얼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미리 가정하고 그에 대한 행동요령을 알려주는 교범이다. 민방위훈련 역시 전쟁이나 재해 상황을 가정하고 관계부처와 국민이 어떻게 행동할지 연습하는 매뉴얼 훈련이다. 예기치않은 사고에 대비해 희생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안전 관련 매뉴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월호 사고를 통해 처절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지키지 않는 매뉴얼은 소용이 없다. 아무리 잘 만든 매뉴얼이라도 서랍에 처박혀 있다면 소중한 목숨을 지켜 낼 수 없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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