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꺼지지 않는 시혼으로 자리매김한 시인 기형도(1960.2.16~1989.3.7)의 시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형도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공식 데뷔했다. 민중시, 노동시 등 투쟁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그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만의 시세계를 공고히 하는 작품들을 줄곧 발표했다.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 서울 종로3가 파고다극장에서 그는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 그가 왜 혼자 심야 영화관에 갔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해 5월, 아름다우면서도 절망적인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刊)에 실린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시편들이 젊은이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포크밴드 ‘신세계프로젝트’가 첫 번째 음반으로 ‘바람의 집’을 선보였다. 이는 기형도 시인의 시(詩)에 곡을 붙인 최초의 앨범으로, 무려 3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기획 및 제작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번 앨범에는 기형도 시인의 대표시 ‘바람의 집’과 ‘엄마 걱정’, ‘안개’가 노래로 거듭났다. ‘바람의 집’은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실린 겨울판화(版畵) 연작시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어머니는 콩나물을 팔러 가고, 누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유년시절 가난의 상처를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담담하게 말한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엄마 걱정’ 시편은 당시 유년의 우울한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를 팔러간 어머니를 배고픈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어조는 서정적이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 시인에게 빈방, 혼자 있음, 외로움 등은 여전히 기형도의 내부 깊숙한 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시인의 등단작이자,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안양천 뚝방 길을 배경으로 하여 지은 ‘안개’는 안개가 주는 막막함과 고통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생의 비애가 시 곳곳에 들어차 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듯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과 축축한 세계 속에서 저 혼자 고통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시인의 보폭이 시 속에 선명하다.
기형도의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의 이미지와 진술들은 이번 앨범에서 절제된 편곡과 내추럴한 어쿠스틱 사운드, 깨끗한 목소리와 적절히 제어된 창법으로 시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의미를 잘 간직하고 있다.
앨범에는 기형도 시인의 시 말고도 김세경 시인의 시 ‘다시, 봄’,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중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한글을 깨우친 어느 시어머니가 생애 처음 쓴 편지글로 만든 ‘며느리 전상서’, 함께하는 한의사 모임 ‘길벗’이 의료 활동을 하면서 쓴 글을 모아 엮은 콜라쥬 곡 ‘벗에게 길을 묻는다’ 등 총 10곡이 수록돼 있다.
이처럼 ‘시는 곧 노래다’라는 모토로 활동 중인 신세계프로젝트는 그동안 시와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들어왔다. 이번 앨범 작업에는 정상급 재즈밴드 ‘루나힐’이 함께했다.
작곡가 노성은씨는 “시(詩)는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시적 감성을 음악으로 온통 전달하기보다 듣는 이가 감성을 보태어주어야 비로소 곡이 완성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며 “특히 이 앨범은 기형도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최초의 음반으로 히트곡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신세계프로젝트는 “노래라는 것이 사랑과 이별 말고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쁨, 슬픔 등의 다양한 감성들을 노래에 담아 편향된 음악시장에 다양성을 확보하고 싶었고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며 “물이 끓은 후 만들어지는 수증기 같은 삶의 글을 노래라는 틀에 가두게 될까 조심스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노래했다”라 말했다.
신세계프로젝트의 노래는 기형도 시인의 시처럼 감정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힘겨운 감사의 망토를 씌우지 않았다. 기형도의 시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듯, 이 음반 또한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듯, 깊은 심연에 잠기는 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다른 색깔의 세계가 열리는 묘한 매력이 넘쳐난다.
노래도 좋아했지만 작사ㆍ작곡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던 기형도, 두레박으로 물을 긷듯 시와 노래로 자신의 저 깊은 곳에서 슬픔의 우물을 퍼올렸던 기형도가 신세계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으면 뭐라 말할까.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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