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잊힐 권리

이연섭 논설위원 yslee@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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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럽사법재판소가 구글 검색 내용에서 개인 관련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를 처음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스페인의 한 변호사가 구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사법재판소는 “구글은 사용자가 시효가 지나고 부적절한 개인 정보를 지워달라고 요구할 때 이를 삭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에 대해 ‘사생활 보호를 위해 적절한 판결’이라는 반응과, ‘개방ㆍ공유라는 인터넷 정신에 위배되고 알 권리를 제한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잊힐 권리’는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과 관련된 기록을 삭제할 수 있는 권리다. 유럽연합(EU)은 2012년 ‘잊힐 권리’를 명문화한 정보보호법 개정안을 확정, 인터넷 사업자가 정보 삭제 요구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100만 유로 또는 1년 매출의 2%까지 벌금을 물도록 했다. 언론게시물, 공공보건ㆍ역사ㆍ통계ㆍ과학연구 목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는 잊힐 권리를 제한했다.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의 저서 ‘잊힐 권리’에 따르면, 중ㆍ장년층은 물론 디지털 기술과 함께 자란 18~24세 젊은층의 84% 이상이 잊힐 권리가 법으로 보장되길 원한다고 밝혔다.

디지털 정보에 대한 권리 논의가 세계적으로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다. 인터넷 기업들의 무차별적인 정보 수집으로 개인 신상정보는 물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까지 인터넷 상에 떠돌며 피해를 주고있는 것이다. 예전에 무심코 올린 글과 사진 때문에 승진ㆍ취업 등 사회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그러나 정보 삭제 요구 남발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범죄자가 과거를 세탁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외국 유력 언론들도 “잊힐 권리가 힘있는 자들의 과거를 덮는 권리가 돼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우리도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지난해 개인이 포털ㆍ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의 삭제 요청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는가 하면, 대법원도 고인의 이메일, SNS 등 ‘디지털 유산’의 적절한 처리 방안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문제는 어디까지 잊힐 권리가 인정돼야 하느냐, 삭제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이냐에 관한 원칙과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언론 보도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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