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이전의 그늘] 1. 가족이 해체된다
수십 년간 지역의 맹주 역할을 자처하며 각 지자체의 세수와 상권 등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공공기관들이 하나둘씩 수도권을 떠나가면서 이들의 빈자리는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국가의 균형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추진된 공공기관의 이전은 과연 소속 기관의 발전과 직원들의 삶의 질 향상에 어느 정도 기여하게 될까.
통근 버스마저 준비되지 않은 장거리 출퇴근은 결국 가족의 해체를 불러오고 이전한 직장인들의 잠자리 잠식은 지방대 학생들의 등골을 빼먹는 기형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백억원에 달하는 부지는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말미암은 개발 부진으로 장기간 방치돼 우범화, 공동화 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또 대부분 수도권에 위치했던 공공기관들이 전라도와 경상도로 이전하면서 회사를 그만두는 엘리트들이 생기고, 이들의 이탈에 따른 업무 공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이에 본보는 공공기관 이전이 가져온 문제점 등을 짚어보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 본다. 편집자 주
직장인 A씨는 9월 전남 나주로 이전이 확정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서울 본사에 근무하고 있다. 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전’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고 있다.
서울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아내, 지방대에 다니는 두 자녀에 본인마저 회사의 이전으로 나주로 가게 되면 가족 구성원 4명이 뿔뿔이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핵가족의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과 직면해야 한다. 생활비도 문제다. 아내를 제외한 3명의 구성원이 모두 원룸 생활을 하면 비용도 만만치 않다.
지난 7월 전북 전주로 이전한 농촌진흥청 소속 B씨(수원 거주)는 요즘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게 두렵다. 아직 어린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주말 부부로 살아야 하는 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40만원짜리 월세 방을 구해서 지내고 있는 B씨는 새로 이전한 부지 근처가 제대로 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 않아 딱히 할 일이 없어 동료와 자칫 술로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B씨는 “국가에서 이전을 결정했으니 따르지 않으면 그만두는 방법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다”면서 “기러기 아빠는 남의 얘기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이 상황에 놓이다 보니 앞으로 생활이 막막하고 답답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7월 52년간 수원을 농업의 메카로 만들었던 농진청이 전북 전주 혁신도시로 떠났다. 사실상 농진청을 시작으로 수도권에 있는 대표적인 공공기관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정부소속기관 31개 가운데 품질관리단(용인→경북),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안양→경북), 농수산식품연수원(수원→광주 전남) 등 6개 기관은 이미 이전이 완료됐고, 농진청과 국립농업과학원은 현재 전주혁신도시로 이전 중이다.
법무연수원(용인→충북) 등 나머지 기관들도 내년 하반기까지는 이전을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또 한국토지주택공사(성남→경남) 등 정부산하기관(29개)들도 늦어도 2016년 말까지 이전을 완료하게 된다.
부지를 옮긴 공공기관 직원들 대다수는 이전 부지 인근에 조성된 원룸 촌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아이들 교육과 집값 문제 등으로 수도권에 터를 잡고 있기 때문에 본인만 이전 청사로 내려가 사는 ‘주말 부부’를 택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제출 받은 혁신도시 이전 대상 25개 기관에 대한 직원가족 이주 및 거주지 마련 계획 설문조사에 따르면 총 직원 1만2천212명 중 38.9%에 해당하는 4천762명만이 가족과 함께 이주할 계획이다.
실제로 농진청의 경우 본청 직원 350여명 가운데 70% 이상이 주중에만 이전 부지 인근에서 혼자 사는 ‘기러기 족’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9월 나주로 이전하는 한국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어린 자녀를 키우는 여직원들은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며 “대부분의 직원은 가족 해체가 불가피한 상황이 됐고, 특히 이주가 불가능한 직원에 대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규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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