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시장의 말은 이랬다. “주민 투표의 모양은 급식이지만 그 뜻은 저소득층에게 복지를 할 것이냐 부자에게도 복지를 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다…원칙과 가치를 지켜내는 일에는 희생이 뒤따를 수도 있다…내년 총선과 대선을 무상복지 프레임으로 치를 수 없다…정치인은 장구한 역사로 봤을 때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해도 더 이상 후회는 없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고 눈물을 흘렸다.
결국, 오 시장은 졌다. 3일 뒤 주민 투표는 33%를 넘지 않았다. 그는 약속대로 시청을 떠났다. 가치를 지켜내려는 희생양이 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정치인이 됐다. 눈물로 했던 나머지 예언도 맞았다. 이듬해 4월 총선(總選)도, 그 반년 뒤 대선(大選)도 무상복지라는 프레임 속에 치러졌다. 무상급식은 되레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보편복지의 상징이 됐다. 젊은 대권 후보 하나를 망가뜨린 무상급식의 첫 번째 전쟁이다.
4년쯤 지났다. 그 전쟁이 다시 고개를 든다. 이번엔 홍준표 경남 지사-그때 오 시장을 철없다며 나무라던-다. “무상 급식·보육은 좌·우,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재정능력의 문제다…무책임한 진보 좌파는 이 문제를 보수와 진보의 가늠자로 삼고 있을 뿐이다…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비겁한 보수도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방조범이다.” 그러면서 경남교육청에 줘 오던 무상급식 지원비를 전면 중단했다.
허나 이번에도 결과는 보인다. 홍 지사가 질 것이다. 학부모 단체가 아우성이다. 시민단체들도 들고 일어났다. 경남도와 밀양시 청사가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오 시장을 은퇴시킬 때 나붙었던 현수막이 또다시 등장했다. “그럼, 애들을 굶기자는 것이냐?”. 청와대가 나서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무상급식은 법적 의무가 아니다”라는 안종범 수석의 논리는 반나절도 안 돼 “무상급식은 헌법적 의무다”라는 반박에 기력을 잃었다.
이것이 무상급식이다. 어떤 정치인, 어떤 세력의 도전에도 꿈쩍 않는다. 오 시장의 논리도 홍 지사의 강단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단한 이념이 있어서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철 지난 산술적 평등이다. 대단한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겨우 표 얻어내는 매표(買票)기술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난공불락이다. 바로 무상급식이라는 공짜 거래의 일방(一方)이 유권자이기 때문이다. 손안에 밥그릇을 움켜쥔 표심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생각나는 말이다. “복지는 뒤로 갈 수 없는 거야. 그래서 걱정이지”. 한 직업 공무원-정창섭 경기도 행정1부지사-이 과거 어느날-민주당 도의회와 김문수 집행부가 무상급식 전쟁을 벌이던-에 독백처럼 했던 말이다. 복지 망국 대한민국의 앞날을 가장 쉽게 예언한 계시록(啓示錄)이다. 실제로 그 뒤부터 시작된 급식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틀었다. 제2의 오세훈의 전쟁도, 제2의 홍준표의 전쟁도 결코 뚫지 못할 철옹성이다.
도리가 없다. 줘야 한다. 급식뿐 아니다. 10조3천억원 짜리 무상보육도 줘야 한다. 10조200억원 짜리 기초연금도 줘야 한다. 적자 전환을 1년 앞둔 건강보험도 줘야 한다. 무상급식ㆍ무상보육ㆍ기초연금ㆍ건강보험, 어느 것 하나 안 주고 버틸 재간이 없다. 정치인들이 학부모들에게, 엄마들에게, 노인들에게, 환자들에게 써준 차용증 때문이다. 애초에 ‘경제력의 한계가 복지의 한계’라는 상식 따윈 무시하고 남발한 차용증 아닌가.
이제, 대한민국 공짜 열차가 마지막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차용증을 발행한 정치인들이 몰고 있고, 그 차용증을 승차권 삼은 유권자가 타고 있다. 복지 천국이라고 써놓고 복지 망국으로 읽어야 할 종착역이 점점 다가온다.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이번 정거장이었는데 그대로 지나가고 있다. 복지를 줄이자는 쪽도 없고, 세금을 올리자는 쪽도 없다. 저마다 ‘내 복지는 좋은 것’이라며 가속 페달만 밟는다. 천지사방에 경고방송이 요란하다.
‘다음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복지망국역, 정면충돌 5분 전입니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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