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회식 지킴이

이연섭 논설위원 yslee@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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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 해군 A중위(26)는 지난해 임관했다. 그리고 올 한해 동안 세 차례나 근무지를 옮겼다. 서류에 적힌 인사이동 사유는 ‘본인 희망’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다르다. 무려 네 차례의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이뤄진 결과다.

시작은 지난해 12월부터였다. 부대 직속상관인 한모 소령으로부터 각종 성적 폭언을 들었다. 남자의 성기를 언급하는 표현도 있었다. 지난 3월에는 또 다른 직속상관인 김모 대위가 훈련 중 함내 여군 침실로 무단 침입해 A중위에게 입맞춤을 시도했다.

견디기 어려웠던 A중위는 전출을 요청했다. 옮긴 부대에서 선임인 김모 중위는 룸살롱을 언급하며 성희롱을 했다. 또다시 옮겨 간 부대에선 직속상관인 임모 중령이 술자리 동석 요구와 성적인 발언을 일삼았다. 이를 보다못한 제3자가 신고해 조사가 시작되면서 A중위가 그동안 겪은 군 일상이 세상에 공개됐다.

 

임관 18개월이 지난 지금 A중위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 직속상관의 징계, 부대 내 따가운 시선들, 무엇보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자신의 미래 등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해군이 여군에 대한 성희롱ㆍ성추행을 막기위해 이달부터 전 부대에서 ‘회식 지킴이’ 제도를 시행 중이라고 한다. 여군 대상 성범죄가 주로 술이 오가는 회식 자리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각 부대는 위관급 이상 장교 중에서 가급적 여군을 회식 지킴이로 임명토록 했다.

회식 지킴이는 회식 때 술을 마시지 못하며 여군에 대한 성희롱ㆍ성추행이 벌어지는지를 감시한다. 여군 앞에서 성적 농담 또는 성적 비하 발언을 하거나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는지 등을 집중 체크한다.

여군에 대한 음주 강권 및 여군의 과도한 음주 여부 등도 파악한다. 회식이 끝난 뒤엔 여군이 무사히 복귀했는지를 확인하고 부대로 돌아와 그날 회식의 이상 유무를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여성가족부가 2012년 6개 공공기관 일반직원 2천15명과 성희롱 업무 담당자 5천94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성희롱ㆍ성추행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87%가 회식 장소를 꼽았다. 이에 회식자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성범죄 예방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회식 지킴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과도한 조치라는 얘기도 있지만 오죽하면 이런 회식 감시인까지 등장했을까. 그냥 웃어 넘기기엔 씁쓸한, 낯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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