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백 투 더 90’s

김종구 논설실장 kimjg@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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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만남’의 고음은 너무 높았다. 김건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I am your girl’의 댄스는 너무 격했다. SES 슈의 춤에서 세 아이 엄마의 버거움이 느껴졌다. ‘트위스트 킹’의 꺾기는 너무 많았다. 터보 김정남의 얼굴에서 쉴 새 없이 땀이 흘렀다. 이미 예전의 몸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관객은 그대로였다. 그 시절 패션을 차려입은 관객들이 가수들의 부족한 호흡을 채워나갔다. 잊혀졌던 ‘떼창’의 원조들이었다.

시청률 35.9%의 광기(狂氣)는 그 후에도 이어진다. 한국 사회가 온통 90년대 가요에 빠져들고 있다. 의류 매장, 헬스클럽, 카페, 라디오 음악 방송…. 가는 곳마다 조성모, 쿨, 김현정, 이정현 노래다. 가히 ‘백 투 더 90’s’의 광풍이다. 애초 드라마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에서 시작된 조짐이다. 그 조짐이 새해 벽두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통해 폭발한 것이다. 20년을 거슬러 달리는 집단의 시간 여행이다.

전에도 세대를 추억하는 화두는 있었다. ‘4ㆍ19세대’, ‘386세대’, ‘70ㆍ80세대’…. ‘4ㆍ19세대’의 주인공은 60년대 민주화를 외치던 대학생이다. ‘386세대’의 주인공은 30대이며 80년대 학번을 가진 60년대생이다. ‘70ㆍ80세대’의 주인공은 70과 80의 학번을 가진 대학생이다. 하지만, 지금의 ‘90’s’는 그것과 다르다. 특정되는 주인공이 없다. 90년대 기성세대, 90년대 대학생, 90년대 청소년, 90년대 출생자까지 모두 주인공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멀지도 않았던 과거다. 그런데도 아주 특별한 추억들이 그 시절에 있었다.

정치는 역동적이었다. 군부(軍部)ㆍ문민(文民)ㆍ진보(進步)가 모두 교차한 10년이었다. 92년까지 대통령은 육사출신 노태우다. 30년 군부독재의 마지막 주자다. 그 기나긴 터널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사정의 칼날이 군(軍)문화를 추풍낙엽처럼 쓸어갔다.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이고 수평적인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것도 97년이다. 권력이 승계(承繼)가 아니라 이동(移動)일 수 있음을 알게 된 특별한 10년이었다.

사회는 다양했다. 그 중심에 지방자치가 있다. 5ㆍ16 쿠데타 세력에게 빼앗겼던 자치권이었다. 더 이상 선거는 중앙 권력을 선택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내 주변 사람을 내 동네 대표자로 뽑는 가슴 떨리는 행위였다. 그렇게 등장한 지방자치가 천태만상의 지역 문화를 만들어갔다. 성곽의 도시, 도자기의 도시, 만화의 도시, 해양의 도시….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수십개의 소국(小國)이 그때 등장했다.

국민은 하나였다. 국가도 부도 날 수 있음을 경험했다. 경제성장과 경기침체가 같은 담벼락 위에 놓여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바로 이런 IMF 위기가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장롱 속 금붙이를 모았고, 숨겨뒀던 달러를 꺼냈다. 세계 금값을 떨어뜨렸고, 한국은행 외환 보유를 늘렸다. ‘남아 있는 동료들이 회사를 살려달라’는 희생의 퇴임사가 곳곳에서 낭독됐다. ‘나라를 살려보자’는 결기(決起)가 무서웠던 때다.

지금 우리가 그랬던 10년에 흥분하고 있다. 그 시절 역동성과 다양성, 애국심의 추억으로 빠져들고 있다. ‘응답하라 1994’에서 시작돼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로 절정에 오른 ‘백 투 더 90’s’에는 이런 시대적 자부심이 깔려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는데….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20년이 흐른 뒤 진행되는 또 다른 10년이다. 그 10년의 한복판인 2015년이다. 거창하게 역사성(歷史性)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지금의 10년이 20년 뒤에 어떤 10년으로 기억될 것인가. 드라마 ‘응답하라 2015’는 등장할 수 있는 것인가. 공연 ‘백 투 더 2015’는 등장할 수 있는 것인가. 전(全)세대를 흥분시킬 감동의 결정체는 준비되어 있는가.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기록될까 봐 걱정이다.

-2010년대는 정치가 역동성을 잃고 정체됐던 10년이다. 종북(從北)에 덜미 잡힌 진보가 질식하고 고루한 보수가 독점했다. 지방자치는 다양성을 잃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완성되지 않은 제도와 절제되지 않은 과욕이 지방 문화를 파국으로 내몰았다. 국민은 위기 극복의 총화(總和)를 잃어버렸다. 정치가 물들인 복지 포퓰리즘이 어렵게 쌓아온 국고를 거덜 냈다. 그래서 2010년대는 광복 90년사에서 지워져야 할 1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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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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