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맥아더 죽이기 회고록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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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더글러스 맥아더는 71세였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며 실질적인 일본의 통치자였다. 현역 미군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이기도 했다. 그가 한국 전쟁의 지휘관이 돼야 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기대는 맞아들어갔다. 역사상 최고로 평가되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 북한군이 퇴각했고 전쟁의 판도는 바뀌었다. 자신감에 찬 그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에 갈 겁니다”. ▶그즈음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이 만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날 만남에서 맥아더는 장담했다. “중국은 결코 참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예상은 틀렸다. 추수감사절 하루 뒤, 중국이 26만의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빠른 승리의 기회는 사라졌다. 대신 확전 시나리오와 함께 세계대전 가능성이 짙어졌다. 이미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던 트루먼에겐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맥아더의 항명(抗命)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언론을 통해 중국과의 확전 필요성을 주장했다. ‘US 뉴스 앤드 월드’ 誌에는 트루먼의 지시를 “사상 유례가 없는 전쟁 수행상의 걸림돌”이라고 공격했다. 대만을 통치하던 장제스를 전쟁에 끌어들여야 한다고도 말했다. 백악관이 군지휘관의 인터뷰는 검열 후에 하라는 대통령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 명령을 수십 번도 더 어겼다. ▶1951년 4월. 결국,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했다. 해임 후 48시간 동안 4만4천통의 전보가 상원에 배달됐는데 이 중 344통을 제외한 나머지가 트루먼을 규탄했다. 상원의원 매카시는 트루먼 측근인 애치슨을 ‘반역자’라고 공격했고, 트루먼을 ‘개새끼’라고 표현했다. 외교위원회와 군사위원회의 합동청문회가 개최했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69%의 지지를 얻고 있는 전쟁 영웅을 해임한 트루먼이 겪은 후유증은 그토록 컸다. ▶맥아더의 해임은 지금도 두 나라에서 정반대로 해석된다. 한국에서는 ‘완전 통일의 기회를 막은 악수(惡手)’로, 미국에서는 ‘천방지축 지휘관을 다룬 강수(强手)’로…. 트루먼은 퇴임 3년 뒤 회고록을 출간했다. 여기서도 맥아더에 대한 풀리지 않은 노기(怒氣)를 드러냈다. “나의 모든 지침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헌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에 대한 도전이었다. 더 이상 그의 불복종을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면 ‘미국 대통령들의 회고록은 참회와 반성, 교훈으로 가득하다’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대통령의 시간’(이명박 著) 속 자기 합리화, 자화자찬도 그렇게 흔한 대통령 회고록 중 하나일 뿐이다. 호들갑 떨 일이 결코 아니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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