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가짜 방화복

이연섭 논설위원 yslee@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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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아파트 등 고층건물의 화재가 많다. 화재 현장에서 나오는 열은 보통 섭씨 300도를 웃돈다. 소방관들이 목숨을 건 현장에 뛰어들어 인명 구조작업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고온에도 견딜 수 있는 특수방화복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뜨거운 불길 속에서 화마와 싸우는 소방관들에게 방화복은 최후의 보루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품질 검사가 조작된 ‘가짜 방화복’이 전국의 소방서에 수 천벌 납품됐다는 것이다. 일선 소방관들은 몇 개월간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방화복에 목숨을 의지한 채 현장에 출동한 셈이다. 오늘도 소방관들이 검증되지 않은 방화복을 입고 화재 현장에서 사투를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화재 진압시 소방관들이 입는 특수방화복은 고온에 잘 견디고 강철보다 질긴 아라미드계열 등의 특수섬유로 만들어진다. 400도 이상의 열을 견뎌야 하는 등의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제품인정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2013~2014년 조달청을 통해 구매한 방화복 일부가 품질 검사를 받지 않고 유통된 것으로 드러났다. 두 업체가 2년간 납품한 방화복은 1만9천300벌. 그러나 소방산업기술원이 인증한 제품은 1만4천벌밖에 되지 않아 5천300벌이 검사를 거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도 이 방화복에 버젓이 소방산업기술원 합격표시 마크가 찍혔다.

문제는 이런 가짜 특수방화복들이 언제부터, 얼마나 전국 소방서에 지급됐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방당국은 뒤늦게 안전검사 미필로 의심이 가는 방화복 착용을 중지시켰지만 ‘안전’을 최일선에서 다루는 현장부서에조차 이런 부실, 불량장비가 공급되고 있는 현실이 충격적이다.

목숨을 건 임무 수행에 보호 장비의 제품 검사는 필수다. 이번 사건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만큼 엄정한 조사와 처벌이 요구된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재난 현장에 뛰어들어 국민 안전에 앞장서는 소방관들의 처우는 형편없다. 지방직 공무원 신분인 이들은 열악한 재방재정 탓에 장갑과 산소마스크 등의 소방 기본장비를 자체 구입하기도 한다. 소방관들에게 제대로 된 방화복 하나 챙겨주지 못하면서 어찌 국민의 목숨을 책임져 달라고 할 수 있을까. 이참에 정부는 소방관들의 낙후된 장비 보강과 신분 보장 등 근본 대책 마련에 나서길 바란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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