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 명절인 설이 지났다. 긴 연휴만큼이나 이번 한 주는 유난히 길다. 큰집이 경주최씨 정무공파 ‘복기’ 자손의 종가라 명절이면 항상 4대 봉사(奉祀)를 모셔왔다.
조부께서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께서 차례와 제사를 모시면서 최근 집안 회의를 통해 3대 봉사로 줄었다. 고조부와 증조부, 조부의 차례를 모시는 것이다. 1년이면 기제사(忌祭祀)와 시제사(時祭祀)를 포함해 10여 차례의 제사와 차례를 지낸다. 그런데 올해 유독 눈에 띄는 상(床)이 있다.
바로 걸상(乞床)이다. 책상, 걸상 할 때 걸상이 아니다. 걸상이 정확히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걸상이라는 표현을 쓴다. 차례나 기제사를 모실 때 상을 3개 차린다. 제일 먼저 성주상에 음식을 올리고 그다음에 제사상에 음식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성주 상과 제사상에 올린 음식 중 남은 것들을 모아 걸상을 차린다.
그동안 수십 번의 기제사와 차례를 모시면서 걸상에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걸상 위에 놓인 10여 개의 수저와 술잔. 과연 이 상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차린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보통 기제사와 차례를 모실 때 성주상과 제사상을 차린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걸상을 차린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 집 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무공을 세우신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중시조인데 정무공파 종가에서는 최진립 장군의 죽음을 끝까지 지켰던 노비 2명의 제사를 아직도 매년 지낸다고 한다. 큰아버지에 따르면 우리 집 안은 노비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고 차례상을 받지 못하는 영혼이나 조상과 함께 오시는 영혼을 모시기 위한 상이라 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예전에는 기제사나 차례를 지낸 후에 걸상의 음식들을 굶주린 이웃이나 걸인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불혹(不惑)을 갓 넘긴 나이에 앞만 보고 내 밥그릇만을 챙기며 달려온 시간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2015년 새해 목표가 수정됐다. 청양의 해 나에게 주어진 대명(大命)은 ‘나눔과 배려’다. IMF 때 보다 경제여건이 안 좋다는 이때 ‘나눔과 배려’의 문화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길 기대해 본다.
최원재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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