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정보전문가 출신 국정원장 시대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기자페이지

정보기관 굴욕의 역사

非 전문가들이 자초

이젠 전문가에 맡겨야

-조사가 마무리된 건 새벽 4시40분이다. 검사들이 조서 출력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가 “용변을 보겠다”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미리 준비했던 흉기를 윗옷에서 꺼냈다. 그리곤 3차례나 자신의 배를 그었다. 고통이 커지면서 몸부림이 시작됐다. 물통 뚜껑을 세면대에 내리쳐 깨뜨렸다. 머리를 벽에 들이받기도 했다. 놀란 직원이 문을 열었을 땐 이미 피투성이였다-. 1998년 3월 21일 새벽. 권영해 전(前) 안기부장은 그렇게 자해(自害)했다.

잔인했던 정보기관 수장(首長)의 역사다. 권 부장에겐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YS에 대한 의리다. 군인이던 그를 국방 장관으로 끌어줬다. 안기부장이란 권력의 핵으로까지 영전시켰다. 권 부장에겐 그런 YS가 곧 국가였다. 反 YS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야 했다. 20만 달러에 재미교포를 매수했다. 김대중 후보를 비방하는 기자회견도 주선했다. ‘북풍(北風) 공작’으로 명명된 범죄다. 결국, 그는 DJ 세상에서 교도소로 갔다.

DJ는 정보기관을 개혁했다. 안기부를 없애고 국가정보원을 신설했다. 청사 곳곳에 구호가 나붙었다. ‘정보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그러나 똑같았다. 국정원과 국정원장의 길이 곧 안기부와 안기부장의 길이었다. 원장은 여전히 DJ가 점지(點指)했다. 군 출신(임동원)과 검사 출신(신건)이 선택됐다. 권 부장에게 YS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DJ가 곧 국가였다. 그들 역시 충성했고 바뀐 노무현 세상에서 도청(盜聽)의 죗값을 치렀다.

정보기관 수장들의 운명이 대개 이랬다. 그들에겐 예외 없는 공통점이 있다. ‘정보’의 ‘정’자도 모르던 인사들이다. 평생 군인, 평생 정치인, 평생 검사, 평생 교수였다. 그런 문외한(門外漢)들이 느닷없이 정보기관장에 올랐다. 대통령의 임명장 하나로 얻어 탄 권력의 꽃가마였다. 꽃 가마에서 끌어내릴 사람 역시 대통령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대통령만을 위한 기관을 만들어 받쳤다. 대통령을 위해 공작했고, 뒷조사했고, 도청했다.

비정상(非正常)의 역사다. 수천 명의 전문가를 1명의 비전문가가 다스리는 조직, 조직에 대한 능력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능력이 선택받는 조직, 이런 비정상의 역사가 대한민국 정보기관을 핏빛 역사로 물들게 했다.

만일, 경찰청장에 군인 출신이 임명된다면? ‘경찰 독립 훼손’이라며 들고 일어날 것이다. 검찰총장에 교수 출신이 임명된다면? ‘검찰권 침해’라며 들고 일어날 것이다. 대법원장에 정치인이 임명된다면? ‘법정신 파괴’라며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경찰청장은 경찰이 하고, 검찰총장은 검사가 하고, 대법원장은 판사가 하는 것이다. 상식 축에도 못 끼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정보기관에는 없다. 국정원장은 여전히 권력의 밥상이다.

CIA와 FBI. 다들 최고라고 부러워 한다. 바로 거기에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는 장(長)의 역사가 있다. 정치권력자에 맞서 온-적어도 권력의 시녀를 자청하지는 않았던- 정보권력자들이 있었다. ‘워터게이트를 무마하라’는 대통령 닉슨의 지시는 CIA와 FBI에서 거부됐다. 헬름스(Richard Helms) CIA 국장은 사직으로 맞섰고, 후버(Edgar Hoover) FBI 국장은 폭로로 맞섰다. 48년간 만들어온 후버의 정보파일이 결국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이게 CIA고 FBI다.

곧 인사 청문회다. 이병호 국정원장 후보자다. 야당이 단단히 벼르고 있다. 야인 시절 썼던 칼럼을 문제 삼을 기세다. 75세라는 고령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철저한 검증은 야당의 책무다. 의혹이 있으면 끝까지 파야 한다. 다만, 이 후보자가 갖는 한 가지 의미만은 챙겨야 한다. 모처럼 등장한 정보 전문가다. 1970년 입사해 27년간을 해외정보에 묻혀 지냈다. 지겹게 봐오던 권력의 낙하산이 아니다. 이 특별한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정보기관을 정보전문가에게! 이 당연한 상식을 찾는데 반백년이 흘러가고 있다.

[이슈&토크 참여하기 = 정보전문가 출신 국정원장 시대]

김종구 논설실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