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세종의 明사신 접대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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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즉위년(1418 무술) 9월 2일. 예조에서 명나라 사신 접대 방식을 왕께 보고한다. “…그날을 앞서 유사(有司)가 모화루(慕華樓)의 서북쪽에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장전 앞에는 홍문(紅門)을 세워 오색 비단으로 꾸미고…사신이 장전 앞에 와서 말에서 내리면, 상왕 전하와 전하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허리를 굽혀 사신을 영접한다…사신이 ‘어명(御命)이 있다’고 말하면, 인례가 ‘꿇어앉으라’ 창하여 상왕 전하가 꿇어앉고, 또 사찬이 ‘꿇어앉으라’ 창하면 전하와 여러 신하들이 모두 꿇어앉는다…” ▶세종 1년(1419 기해) 1월 19일. 세종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부절과 고서를 받는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사신은 절(節)을 받들고 나가니, 임금과 상왕은 전정에 나가 공경히 전송하고, 여러 신하는 절을 인도하며 태평관(太平館)에 당도하여…”. ▶세종 2년(1420 경자) 4월 17일. 세종이 명 황제의 생일 의식을 거행한다. “임금이 성절(聖節)이라 하여 경복궁에 거둥하여 악차에 나아가니, 사신이 평복으로 와서 근정전 노대(露臺) 위에서 네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뒤에 물러나 동쪽 행랑으로 들어가고, 임금이 면류관을 갖추고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에 따라 요하(遙賀) 한 뒤에 사신과 함께 경회루에서 잔치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사신’이라는 기록이 2,238번 나온다. 아버지 태종의 실록에는 645번, 장수한 영조의 실록에는 1,283번 나온다. 명나라 사신에 대한 세종의 접대가 그만큼 각별했다. 재임 후반부로 오면 사신을 위한 잔치 기록이 숱해진다. 4군 6진으로 북방을 개척하고, 대마도 정벌로 왜(倭)를 물리친 세종이다. 그런 세종이 명 사신 앞에서 엎드리고, 절하고, 춤추고, 만세 불렀다. 태평성대를 위한 외교술인가 강대국에 대한 사대주의인가. 정답은 없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당했다. 편향된 이념주의자에 의한 테러다. 그의 병실이 내방객들로 붐볐다. 여야 정당 대표가 문안했다. 대통령도 중동 방문 귀국길에 병실을 들렀다. 병원 밖에는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비는 현수막이 나붙었다. 우방국 대사에 대한 따뜻한 위로의 표현인가 강대국 대사에 대한 과한 사대인가. 이 물음에도 정답은 없다. 세종의 명나라 사신 접대의 경우와 같다. 다만, 정치인들은 좀 빠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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