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펼쳐질 ‘명승부’ 승리의 함성을 위하여 해머·밀대 ‘등판’ 그라운드 ‘파수꾼’
짧은 여름 밤은 저만치 물러나고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
지난 4일 새벽 5시 프로야구 10구단 kt wiz 홈 구장인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섰다.
전날 밤 이곳 녹색 그라운드 위에선 kt의 마법사 9명이 ‘백구의 마법’을 펼쳤다. 몇 시간 지난 새벽녘 이 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스프링쿨러만이 물을 뿜으며 잔디를 적시고 있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복도와 연결되는 출입구에서 그라운드 관리사 김상훈 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오셨네.지금은 잔디에 물주는 거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요. 스프링쿨러에 타이머 설정해놨으니까 조금 쉬고 계시다가 이따 직원들 오면 그라운드 손 좀 보시죠.” 더그아웃에 앉았다. 그라운드 너머 불 꺼진 관중석에는 널브러진 쓰레기 더미가 희미한 조명을 받아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조금 있으면 미화원들이 정리를 시작한다고 한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오고, 관중석에 손님이 북적이기 전 새 단장을 마치는 것이다. 케이티 위즈 파크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케이티 위즈 파크 ‘힘찬’ 하루를 열다
아침 햇살이 그라운드에 쏟아져 들어올 무렵 김 소장을 따라나섰다. 원정팀 더그아웃 옆 작은 공간에서 밀대, 바닥이 넓적한 해머, 물통, 그리고 흙이 담긴 바구니를 챙겼다.
김 소장은 그라운드를 손질하러 간다고 했다. 홈플레이트 부근으로 가니 타석 곳곳이 패여 있었다. 어제의 흔적이다. 선수들은 타격 시 힘을 받고자 홈을 파놓는다. 이걸 다시 메워야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부상을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지난 2007년 롯데 자이언츠 외야수 이승화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 왼손이 홈에 들어가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했다. 자칫 뼈가 부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아찔한 순간을 예방하고자 그라운드 관리사들은 경기 다음날 홈을 메운다.
두 번째는 미관을 위해서다. 김 소장은 “이렇게 파여 있으면 보기 안 좋잖아요. 특히 비가 온 날이면 더더욱 보기 흉해요”라고 말했다. 홈은 마운드에서도 찾을 수 있다. 투수들이 투구 시 찍는 디딤발의 자취다. 마운드에 오르면 땅을 파는 투수들의 습관이 만든 자국이기도 하다. 투구 동작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마운드의 흙을 다지면서 본인 만의 포인트를 찾는 작업이다.
김 소장은 물을 뿌린 뒤 밀대로 땅을 쓱쓱 밀어 골랐다. 선명하게 드러난 홈 위로 흙을 모아 두 손으로 두둑을 만들었다. 해머를 기자에게 건넸다. “자 이걸로 흙을 힘껏 내려치세요.” 해머는 지름 30㎝ 정도의 원형 바닥과 1m 길이의 쇠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무게는 20㎏ 정도다. 볼록하게 올라온 흙을 바닥부분으로 약 10번 정도 방아 찍듯 내리치면 평평하게 펴지면서 홈이 채워진다.
땅과 수직을 유지하며 내리찍는 게 포인트다. 자칫하면 손잡이 역할을 하는 쇠기둥이 바닥부분에서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여분용 해머를 하나 준비해 놓는단다. 부러진 해머는 용접해 재활용하기도 하지만, 대개 버리는 게 일반적이다. 이날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해머가 나왔다. 타석을 정리하면서 기자가 분질러 먹었다.
김 소장은 “원래 잘 부러진다”며 “개의치 않아도 된다”고 기자를 위로했지만, 미안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인천에서 주문 제작하는 까닭에 새 해머를 사들이기까진 보통 2, 3일 소요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마운드와 불펜 마운드 보수는 직원 2명이 여분용 해머로 했다. 팼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나면 다시 밀대로 땅을 골랐다. 그리고는 물을 뿌렸다. 김 소장은 “물을 안 뿌려주면 흙먼지가 날려요. 불펜 같은 경우는 흙먼지가 관중석으로 날아갈 수도 있죠. 또 땅이 갈라지는 걸 막으려는 조치인 셈이죠”라고 설명했다.
이제 남은 건 땅이 어느 정도 마르길 기다렸다가 마운드엔 방수포를, 타석에는 인조잔디를 덮는 일이다. 방수포와 인조잔디는 경기 시작 30분 전이돼서야 걷어낸다. 통상 선수들은 오후 2시께 그라운드에 들어서 몸을 풀곤 하는데 그때도 인조잔디 위에서 타격 연습을 한다.
■ 내야·외야 다른 잔디무늬… 갓난아이 돌보듯 애정의 손질
야구장 잔디는 단순히 풀이 아니다. 과학이라고 말한다. 잔디와 흙을 유지하는 데에는 어느 분야보다 치밀한 과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SK 와이번스가 창단한 2000년부터 줄곧 문학구장 잔디와 함께 지내다 올 시즌 케이티 위즈 파크로 옮겨 잔디와 흙을 관리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케이티 위즈 파크가 개장하고 나서 여태껏 쉰 날이 16일 정도밖에 안 돼요. 잔디 때문이죠.갓난아이와 같아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요.” 김 소장의 말이다. 케이티 위즈 파크 잔디는 외국종인 ‘켄터키 블루그래스’에 속하는 품종이다. 길이 25㎜를 유지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꼴로 잔디를 깎는단다.
케이티 위즈 파크 내야와 외야 가운데 잔디는 직선 무늬를 띄고 있다. 외야 좌우 측면도 직선 무늬를 띄고 있으나, 방향이 홈플레이트 쪽으로 틀어져 있다.
김 소장은 “선수들의 의견을 반영해 무늬 방향을 결정한 것”이라며 “잔디 무늬에 따라 타구의 바운드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무늬는 잔디를 깎는 방향으로 만든다. 얇은 무늬 한 번, 두꺼운 무늬 한 번으로 단순함을 피한다. 무늬를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다. 롤러로 자로 잰 듯 눌러줘야 무늬가 선명하게 유지된다.
케이티 위즈 파크는 잔디 깎는 기계에는 롤러기능도 포함돼 번거로움을 덜어줬다. 김 소장은 능숙한 운전 솜씨를 선보이며 잔디를 깎고, 무늬를 만들어갔다. 기자가 간단히 설명을 듣고 기계를 운전해 봤으나 굼벵이 담 넘어가듯 한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순 없었다.
혹여나 무늬를 망가뜨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이내 운전대를 뺏겼다. “그렇게 해선 하루 종일 해도 못 깎아!” 김 소장이 다시 핸들을 잡으면서 잔디 정리가 제 시간에 마무리됐다.
다음에는 그라운드의 흙을 고르러 나섰다. 수비를 하면서 많이 움직이는 선수, 또는 강하게 슬라이딩하며 몸을 사리지 않는 선수들로 인해 파헤쳐진 그라운드를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 정토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흙(불규칙 바운드) 때문에 졌다”는 볼멘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김 소장은 “불규칙 바운드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해요.잘 골라놔도 경기를 하다 보면 흙이 패이곤 하거든요. 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선수들한텐 미안하죠”라고 말했다. 내야는 그라운드 정비용 차량, 일명 ‘골프차’를 이용해 다진다.
김 소장은 기자를 위해 옆자리를 내줬다. “기자님은 이따 밀대로 미시고, 일단 타세요” 김 소장이 운전대를 잡고 원형을 그리며 몇 번 돌다 보니 금세 그라운드가 매끈해졌다. 골프차가 닿지 않은 부분은 기자가 밀대로 밀었다. 칭찬을 들었다. “그렇지! 이제야 자세가 나오네.”
정토 작업까지 마치자 시곗바늘은 오전 11시를 향하고 있다. 그라운드 관리사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다. 김 소장을 따라 케이티 위즈 파크를 나와 건너편 상가 지역으로 향했다. ‘함바집’ 분위기가 풍기는 식당에서 동태찌개로 식사를 한 뒤 케이티 위즈 파크에 돌아온 시간은 정오가 가까운 시각. 아직 경기장 주변은 한산하다.
그라운드 관리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오후 2시가 되면서 다시 분주해졌다. 홈ㆍ원정팀 훈련에 앞서 그라운드를 정리하고 파울라인을 그려야 한다. 경기 시작을 앞두고 이 작업을 또다시 반복했다. 경기 시작 후에도 3회, 5회, 7회가 끝나면 어김없이 정토 작업을 한다. 경기가 끝나고 팬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정리는 계속됐다.
시즌이 열리는 동안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는 선수와 팬이 없어도 쉬지 않는다. kt wiz의 마법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노력하는 그라운드 관리사들의 고생과 땀 덕분일지도 모른다.
조성필기자
사진=김시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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