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박기춘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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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춘 의원이 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했다. 뇌물 혐의로 내사를 받는 사실이 알려진 지 한 달여만이다. 그의 모습을 취재하려는 기자 수십여명이 검찰 현관을 지켰다. 포토라인에 선 그가 입을 열었다. “국민 여러분과 남양주 시민 여러분, 국회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본인 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준비해온 듯한 한 마디를 남겼다.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어제(10일)는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어느 때보다 당이 어려운 상황에서 3선 중진 의원이 당에 오히려 누가 되고 있다. 30년 정치 여정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마무리하도록 기회를 갖고 싶다.” 곧바로 새정치연합을 공식 탈당했고 무소속 신분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혐의 사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정치자금과 과도한 축의금, 시계 선물 등의 수수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역시 모든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우리 정치사에 금품 스캔들은 숱했다. 그중에도 최악은 ‘차떼기 대선 자금’이다. 2.5t 트럭에 실린 현금 150억원을 통째로 넘겨받은 사건이다. 이런 엄청난 비리가 처음 알려지던 2003년 10월 9일, 최돈웅 당시 국회의원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비자금 수수설은 전혀 사실무근임을 이 자리에서 명백히 밝힙니다” “구체적인 혐의 내용도 없이…출석하라는 것은 검찰권의 남용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진실이 드러났고 그는 전달자로 확인됐다. ▶금품 스캔들에 휘말리는 정치인들이 늘 이랬다. 우선 ‘정치적 탄압이다’라며 혐의를 부인한다. 이어, ‘당의 입장을 따르겠다’며 검찰 소환에 버틴다. 모든 게 들통나는 순간에도 붙들고 늘어질 해명은 있다. ‘돈은 받았지만 대가성은 없었다.’ 요사이 매스컴을 오르내리는 금전 스캔들도 같다. 누구 하나 죄를 시인하지 않는다. ‘혐의가 드러나면 목숨을 내 놓겠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이런 정치적 수사(修辭)에 이젠 국민도 진저리를 친다. ▶알려진 박기춘 의원의 혐의 사실은 가볍지 않다. 현금 2억7천만원을 받았고 명품 시계 2점, 고급 안마 의자도 받았다. 사법부의 엄한 처벌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 있다. 회피하지도 않고, 부인하지도 않는 그의 태도다. 지금까지 봐 왔던 다른 정치인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 정치로 더럽혀진 과오에 대한 인간적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설혹 소송 기술적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판단은 옳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정치인 박기춘 인생’이 아니라 ‘자연인 박기춘 인생’이다. 구차한 정치는 불특정 유권자를 잃지만 구차한 인생은 평생 갈 주변인까지도 잃는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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