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엉뚱했다. 자가발전(Private power stationㆍ自家發電)은 산업용어다. 그런 말이 왜 검찰에서 쓰일까.
본래 의미는 ‘필요한 전력을 스스로 만드는 행위’다. 이를 그대로 검찰에 원용하면 이렇다. ‘검찰이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행위’. 알듯 모를 듯한 이 말의 실체를 깨달은 건 법조 기자 3,4년차쯤 돼서다. 검사가 수사하려는 사건의 단초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 우편으로 배달되는 익명의 투서, 고발장 등이 단골 소재였다. 직접 쓰기도 했고 제3자에게 시키기도 했다. 물론 수신인은 수사 검사 본인이었다.
90년대 후반. 지역 내 어느 기업인에 대한 수사도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 알게 된 신출내기 기자엔 충격이었다. 특수부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스스로 만든 투서로 수사에 착수할 수 있나. 부도덕하다’. 특수부장의 답변이 지금도 생생하다. “○○기업이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지? 그런데 우리가 수사하면 표적 수사라고 난리 치겠지? 이 빽 저 빽 동원할 거고. 검찰 수사는 결과만큼이나 착수의 정당성도 중요한 거야.”
실제로 그랬다. 특수수사의 대상은 힘 있는 사람들이다. 저마다 들이댈 빽과 떠들어 댈 목소리가 있다. 그들이 하는 항변이 있다. 바로 ‘표적수사’다. 혹여 수사 과정에 변고(變故)가 생기거나 무죄(無罪)라도 날라치면 항변은 더 격해진다. 이쯤에 이르면 검찰은 수사가 필요했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 정당성의 징표가 바로 투서 또는 고발이다. 이 징표를 스스로 만드는 게 자가발전이었다. 벌써 꽤 된 얘기다.
검찰의 자원외교 수사가 벌써 열 달 째다. 당초 조사부 사건이었다. 그러다가 특수부로 넘어갔다. 경제수사에서 특별수사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감사원과 참여연대의 고발장이 수사 단서였다. 그때 슬그머니 섞여 들어간 다른 수사가 있다. 이른바 포스코(POSCO) 비리 수사다. 여기엔 딱히 알려진 수사 단초도 없다. 언론이 곧바로 전(前) 정권에 대한 수사라고 명명했다. 타깃은 전 대통령 측일 것이라 못 박았다.
그리고 10개월이 흘렀다. 예상은 그대로 맞았다. 다 빠지고 포스코와 전 대통령의 친형만 남았다. 검찰은 전 대통령 형이 돈을 받았다고 한다. 전 대통령 형은 절대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한다. 법원이 내릴 최종 판결은 아직 멀었다. 유무죄를 따질 게재가 아니다. 얘기하려는 건 검찰을 보는 여론이다. ‘전직 대통령 잡으려는 수사였다’ ‘친이에 대한 보복수사였다’. 이 술자리, 저 밥 자리에서 단정되는 바닥 여론이다.
운명이라 치자. 사실 그런 소릴 들을 데자뷔가 검찰엔 너무 많았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 노무현 대통령 수사…. 검찰은 매번 정의(正義)를 얘기했지만, 여론은 냉랭했다. 모두 권력 입맛에 맞춘 정치 수사라고 결론 냈다. 돈 쓰는 정치풍토를 혁명적으로 바꿨다고 평가되는 참여정부의 대선자금 수사? 결과는 여당 114억원 대 야당 823억원이었다. 이를 정의라고 말한 사람은 많지 않다.
안타까운 건 지금의 수사가 앞서의 것들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 잡음은 많고, 결과는 미미하다. 수사 대상자가 억울하다며 목을 맸다. 사정(司正)을 선포한 총리가 사정의 대상이 됐다. 포스코 부회장, 건설사 회장, 자원공사 사장의 구속 영장이 줄줄이 기각됐다. 전 대통령의 친형을 소환하면서 수사가 정점을 찍는 듯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검찰 사정으로 구속됐던 전 해군 대장(大長)이 무죄로 석방됐다.
때를 맞춰 전 대통령의 형은 중(重)환자 코스프레로 청사에 나타났다. ‘감옥에서 나온 지 2년밖에 안 됐다’는 감상적 기사들도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여론의 화살이 검찰수사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80세 노인 잡으려고 그 난리를 쳤나’ ‘겨우 갓끈 떨어진 가족 구속인가’…. 졸지에 검찰은 무모한 수사, 무능한 수사의 주체가 돼버렸다. 무려 10개월, 정권의 5분의 1을 소비한 수사에 내려지는 차디찬 평(評)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때. 수원지검이 수사한 것은 동네 작은 기업이었다. 그런데도 수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자가발전’의 무리수까지 뒀다. 하물며 권력을 겨누는 수사다. 돌아보면 국민에 동의를 구하고 시작했어야 했다. 없다면 ‘자가발전’이라도 해서 만들었어야 했다. 고민했는데도 동의를 구할 수 없었고, 노력했는데도 단초가 없었던 수사라면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 ‘수사 안하겠다’고 당당히 거부했어야 했다.
검찰에 있어 ‘성역 없는 수사’만큼이나 소중한 가치가 ‘성역 없는 수사 거부’이기 때문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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