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해부하라~ 제갈량도 울고갈 ‘날카로운 데이터’
노크 후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 너머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지난 시즌 내내 봐 왔던 그 얼굴들. 얼마 전 결혼식을 올린 임대현씨, 지난해 11월 익산 마무리캠프에서 도움을 받았던 이성권씨, 그리고 이곳의 책임자인 심광호씨까지. 이들은 프로야구 kt wiz의 전력분석원들이다. 그렇다. 기자가 찾은 이곳은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 내 전력분석실이었다.
“일일체험 때문에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스프링캠프가 코앞이라서 할 일이 많으실 거예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신입사원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부려주세요.”
“일단 일을 하려면 배우셔야죠. 이쪽으로 오세요.”
■ 프로야구 전력분석원의 세계
지난 시즌 리그 사상 최다인 736만529명의 관중이 모인 프로야구의 발전은 과학적인 분석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 대해 분석하고 연구함으로써 수준 높은 기술을 갖추게 됐다. 흔히 야구를 정적인 운동이라고 한다. 야구는 축구나 농구처럼 격렬하지 않다. 반대로 한 번의 폭발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또 상대와의 수 싸움이 가장 많은 운동 중 하나가 바로 야구다.
그 핵심이 전력분석이다. 프로야구에서 상대를 어떻게 파헤치고 얼마나 치밀하게 경기를 준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조범현 kt 감독은 이런 전력분석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령탑이다. 매일 300~500장에 달하는 전력분석 보고서를 읽고, 공부한다. 또 이를 자신만의 데이터로 만든다. 그가 지장이라 불리는 이유다. 한편으로는 이처럼 꼼꼼한 감독을 모시는 전력분석원 입장에선 그만큼 할 일이 많은 셈이다.
전력분석원들이 꾸미는 보고서는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에게만 제공되는 게 아니다. 선수들도 이들 전력분석원이 만든 보고서와 영상을 통해 경기를 복기하고, 공부한다. 심광호 전력분석원은 “예전 같으면 정답을 주는 역할이었다면 현재는 답안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수들이 공부할 수 있는 문제지를 주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며 “쉽게 말해서 선수들에게 팁을 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자료·영상과 ‘고군분투’
감독 및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보는 보고서와 영상은 전력분석원들의 땀이 곁든 결과물이다. 현재는 비시즌이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일반 직장인과 같은 리듬이지만, 시즌 중에는 밤을 지새우며 보고서와 영상을 만든다.
전력분석원들은 자료와 영상으로 나뉘어 각자 맡은 임무가 있다. 심광호 전력분석원은 모든 자료를 담당한다. 경기를 보며 상대에 대한 자료를 취합한다. 상대 선발의 볼 스피드와 구질, 볼 배합, 최근 컨디션 등 자세한 분석 사항을 정리해 선수단에 배포한다.
이성권 전력분석원은 영상 담당이다. 모든 경기 영상을 녹화하고 필요한 자료를 뽑아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팀 미팅에서 선수단에 공개되곤 한다. 임대현 전력분석원은 연봉 고과 산출이 주 업무다. 시즌 중 조범현 감독 옆에 자리해 기록에 열중하는 인물을 TV중계를 통해 볼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임대현 전력분석원이다.
전력분석원들은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있는 이맘때면 각 팀의 새 얼굴을 분석한다. 새로이 영입된 외국인 선수와 신인들이 분석대상이다. 심광호 전력분석원이 기자에게 한창 바쁠 때라고 이야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전력분석 맛보기… 화면가득 빼곡한 그래프 향연
심광호 전력분석원은 설명을 끝마치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는 HDMI 포트를 이용해 대형 TV와 연결했다. TV화면에는 kt 투수 조무근의 투구 분석표가 담겨 있었다. 승패와 평균자책점 등 클래식 스탯부터 WHIP(이닝당 출루 허용률), GO/FO(땅볼/뜬공 아웃 비율) 등 2차 스탯이 빼곡했다. 조무근이 구사하는 구종과 카운트 별 비율 등은 그래프로 그려져 있었다.
“kt가 스포츠투아이와 협력해 만든 프로그램이에요. 데이터를 입력하면 이처럼 자동 구축되는 시스템이죠. 저희는 이걸 토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선수단에 건네요. 예를 들면 카운트 별로 어느 공을 던졌을 때 타자들에게 집중공략 당하니 투구 패턴의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식이죠. 조무근 같은 경우는 초구는 직구, 이후 슬라이더를 던지는 경향이 짙은데 보통 슬라이더가 많이 공략당하곤 하죠. 이런 점을 귀띔해주는 거예요.” 심광호 전력분석원의 말이다.
kt 새 외국인 투수 슈가 레이 마리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기자가 마리몬이 던지는 투심패스트볼의 높은 피안타율을 지적하자 임대현 전력분석원은 “그러면 못 던지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놨다. 심광호 전력분석원은 “그래도 방망이에 맞는 비율인 Contact%가 95%에 달한다는 건 제구가 어느 정도 된다는 의미”라면서 “구사 비중을 조정한다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훈련 지원’ 불철주야
kt는 오는 15일 미국 애리조나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스프링캠프라고 일컫는 이 해외 전지훈련이 시작되면 개막 직전까지 쉴 틈이 없다. 스프링캠프를 사실상 시즌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전력분석원들도 이 전지훈련에 따라나선다. 현지에서 이뤄질 연습경기를 분석하기 위함이다. 선수들의 훈련에 따르는 허드렛일도 이들의 몫이다.
“공부터 시작해서 배팅볼 기계까지 옮기고 세팅하는 것도 전력분석원들이 돕고 있어요. 선수들이 자칫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잖아요. 우리 전력분석원들도 모두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심광호 전력분석원이 덧붙인 설명이다.
전력분석만 해도 벅찰 텐데 이런 허드렛일까지 거드는데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다. 심광호 전력분석원은 “안 힘든 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는 “그래도 감독님을 비롯한 선수단이 ‘수고했다, 고맙다’라고 말 한마디 건넬 때 큰 힘을 얻곤 한다”며 “그 정도면 이 일을 하는 데 충분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조성필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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