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시 하늘에 미국 전략 폭격기 B52가 떴다. 10일 오전 6시 괌 앤더슨 공군기지를 출발했다. 4시간 만인 낮 12시에 오산 상공을 지나갔다. 우리 공군 F15K 전투기 2대와 주한 미공군 F16 전투기 2대가 호위했다. B52가 훑고 지나간 곳은 휴전선 이남 한반도 전부다. 북한의 4차 핵실험 4일만이다. ‘공대지 핵미사일 폭발력 170kt, 지하 벙커를 뚫고 들어가는 벙커버스터 탑재.’ B52의 가공할 위력이 또다시 지면을 채웠다. 한국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중국과는 직통 전화가 있다. 2015년 12월 31일 개통한 군사 핫라인이다. 2014년 한ㆍ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안보장치다. 전화 개통 일주일 만에 북한 핵실험이 이뤄졌다. 전화기의 용도가 실전에서 쓰일 첫 계기였다. 그런데 전화는 안 됐다. 중국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기 시연(試演)까지 했던 한민구 국방장관의 일주일 전 모습이 웃음거리가 됐다. 핫라인이 불통이니 군사당국자간 대화가 있을 리 없고, 북핵 사태에서 중국의 역할이 있을 리 없다. ▶작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 시진핑 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사회주의 국가 원수들 사이에 도열한 유일한 자본주의 대표였다. 미국은 곱지 않게 봤고 일본은 강하게 반발했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한중 관계를 ‘역대 최상’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 대단원의 백미는 한중간 군사 핫라인 개설이었다. 그랬던 핫라인이 불과 일주일만에 무용지물로 확인됐다. 중국의 행보는 한 발자국도 우리 쪽으로 옮겨지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김용식(1913~1995)이라는 외교관이 있었다. 주영대사-외무장관-유엔대사-외무장관-통일원장관-주영대사-주미대사…. 마지막 임무는 이른바 박동선 게이트 사건의 해결사였다. 대한민국 외교는 힘들고 위기일 때마다 그를 선택했다. 훤칠한 키, 매력적인 콧수염, 유창한 영어 실력, 세련된 매너. 지금도 외교가에선 그를 한국 외교의 레전드라 부른다. 그가 과거 TV 프로그램에서 외교관이 갖춰야 할 첫째 요건을 꼽았다. “외교관은 셈을 잘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 외교는 ‘껄끄러운 대미관계ㆍ적대적 대일관계ㆍ친밀한 대중관계’였다. 적어도 위안부 타결 전까지는 그랬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이 터졌고 그 중 2개의 관계가 민 낯을 보였다. 껄끄러운 미국은 B52를 보내왔고, 친밀한 중국은 직통 전화를 꺼버렸다. 김용식씨가 생존했다면 분명히 ‘셈이 틀렸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도 ‘셈이 틀린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 외교에 쏟아지기 시작한 우려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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