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병희 의원이 남긴 일화가 있다. 불우이웃 돕기 행사에 참석했다. 물품 전달 장면을 촬영하려고 줄을 섰다. 그때 보좌진들이 웅성댔다.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이 의원은 “사진이 중요하냐. 괜찮다”며 온화한 웃음으로 행사를 끝냈다. 역시 여유 있는 7선(選)이었을까. 보좌진들이 차에 올랐다. “이 ○○들, 귀빵맹이(뺨)를 한 대씩 돌려 버릴까 보다.” ‘수원 정치의 전설’ 에게도 행사는 그렇게 중요했다. 보좌관 출신 김모씨(71)가 증언한다. ▶이윤수(77ㆍ3선) 전 의원은 ‘영원한 DJ 경호원’이라 불린다. 숱한 정치적 역경을 DJ와 함께 했다. 그런 만큼 견제와 왕따에 익숙했다. 그런 그에게 ‘하얀 장갑’ 일화가 있다. 호주머니에 늘 하얀 장갑을 넣고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외(院外) 의원은 찬밥이다. 불러주는 곳도 없고 마이크를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곳을 밀고(?) 들어갔다. 장갑 안 주면 자기 장갑을 꺼내 끼고 테이프 커팅 줄에 섰다. 경력 좀 있는 정치기자들이라면 한 번쯤 들었을 ‘이윤수 하얀 장갑’ 일화다. ▶1월 20일, 수원의 한 호텔에서 정조대왕 학술 대회가 열렸다. 정치인들 서너명이 참석해 맨 앞줄에 앉았다. 시장이 인사말에서 한 명 한 명을 소개했다. 행사가 시작되자 모두 자리를 떴다. 21일은 같은 장소에서 관광 활성화 포럼이 열렸다. 어제 그 얼굴들이 또 참석했고 또 소개를 받았다. 역시 행사 도중 나갔다. 22일엔 시 체육관에서 축제가 열렸다. 5천여명의 시민들이 객석을 꽉 채웠다. 이번엔 더 많은 정치인이 몰려왔다. 현역의원들은 무대로 올라갔고, 돌아가며 마이크까지 잡았다. 객석 여기저기서 짜증이 터져 나왔다. ▶선거가 60여일 남았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정치 행사 참여가 금지됐다. 시장 군수 그리고 도지사들의 말 한마디는 중요하다. 자칫 유권자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걸 막기 위한 규정이다. 잘한 제재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시민 행사 참여에는 제재가 없다. 아무 행사나 뻘건 옷, 퍼런 옷을 입고 단상에 오른다. ‘인순이’ 기다리는 팬들이 조바심 내고, ‘BAP’ 보러 온 팬클럽이 분노하는데도 무조건 ‘분량’을 챙긴다. ▶이병희ㆍ이윤수 시대는 사회가 그랬다. 행사장 가야 시민을 만날 수 있었다. 신문 귀퉁이에 얼굴이라도 나와야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인터넷 무한 소통 시대다. 부지런만 떨면 얼마든지 자신을 알릴 수 있다. 굳이 행사장에서 눈총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행사장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 잡으려고 안달이다. ‘민폐 끼치지 않겠습니다’며 단상 초대를 정중히 사양하는 정치인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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