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출신·77세 고령-
선거판의 금기(禁忌)라 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위다. 햇볕 정책을 건드리는 것과 노인을 건드리는 것도 그런 유(類)의 금기다. 특히나 야당엔 그렇다. 그런데 이 금기를 맘대로 넘나드는 정치인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다.
햇볕정책부터 건드렸다. “북한이 핵을 갖지 않았던 시점의 햇볕정책은 유효한 대북정책이었지만, 북한이 핵을 보유한 지금 대북정책은 진일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진일보 해야 한다’는 표현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개성공단도 폐쇄되고 대화 자체가 중단돼 버렸는데 대화가 영원히 중단돼선 안 되니 앞으로 가자는 얘기다. 뭐가 잘못됐나.” 25일 호남의 중심 광주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김종인의 광주 선언’이라 명명됐다.
햇별 정책은 곧 DJ(김대중)다. DJ의 철학(哲學)이자 유지(遺志)다. 햇볕 정책을 건드리는 건 곧 DJ를 건드리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호남 민심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종인 대표는 그걸 건드렸다. 미사여구를 빼고 보면 ‘철 지난 햇볕정책’이란 소리다. 통상 이 정도면 야당 대표에겐 자살골이다. 국민의당이 발 빠르게 파고들었다. 연일 김 대표를 공격했다. 박주선 최고위원은 아예 “새누리당과 연대하려는 짓”으로 몰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호남 민심이 그리 나빠지지 않는다. 당내에서도 발언을 문제 삼는 소리가 없다. 왜 그럴까. 복잡하게 보지 말자. 인지상정으로 풀면 된다. 김 대표는 전라도 사람이다. DJ는 전라도 상징이다. 지연(地緣)에 관한 한 둘에겐 동향의 피가 흐른다. 경상도에게 전라도가 ‘문딩이’라면 얻어맞는다. 하지만, 같은 경상도끼리 하는 ‘문딩이’는 애칭이다. 김종인에 흐르는 호남 DNA, 이것이 그에겐 햇볕정책을 쳐도 될 무기다.
아슬아슬한 게 또 있다. 연장자(年長者) 퇴출 분위기다. 현역 물갈이 기준이 마련됐다. 1차 컷오프, 2차 정밀심사다. 그런데 2차 심사 기준이 이상하다. 3선 이상의 50%, 초ㆍ재선의 30%를 무조건 대상으로 삼았다. 3선 이상 대부분은 60세를 넘는다. 정치적 다선(多選) 이전에 인간적 연장자다. 여기에 1차 컷오프 결과가 나왔는데, 당의 어른인 문희상(72), 유인태(69) 의원이 포함됐다. 졸지에 나이 먹은 게 죄(罪) 되는 당이 됐다.
어느 선거에서나 노인층은 지뢰밭이다. 잘못 건드리면 한방에 간다. 12년 전 정동영씨도 그랬다. “노인들은 선거장 안 나와도 된다”고 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해명도 안 통했다. 당 의장에서 쫓겨났다. 지금도 ‘정동영’ 검색어에는 ‘노인 폄훼’가 뜬다. 국민의당이 김종인 표 ‘3선 교체’를 흉내 냈다.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곧 당내 반발로 이어졌다. 3선의 김동철 의원(62)이 ‘나만 3선이냐’며 들고 일어났다. 당(黨)만 우스워졌다.
이것도 이상하다. 김종인 대표는 어떤 욕도 듣지 않는다. 되레 전권(全權)을 더 넘겨받았다. 왜 이럴까. 여기도 간단하게 풀어 보자. 그의 나이 77세다. 현역 국회의원 최고령이라야 75세(박지원ㆍ무소속)다. 원로 대우받던 문희상, 유인태도 동생뻘이다. 50대 안철수 대표가 ‘3선 연장자들 물러나라’면 노인 폄훼다. 하지만, 77세 김종인 대표가 ‘많이 한 애들은 나가라’고 하면 그냥 어른의 조언이다. 이 역시 77세 김종인의 무기다.
그가 느닷없이 등장했던 한 달 전. 다들 얼마 못 갈 거라고 했다. ‘바지 사장’만 하다가 끝날 거라고들 했다. 그런 그가 한 달을 넘겼다. 공천권까지 거머쥔 실세가 됐다. 더민주당의 여론까지 덩달아 올라갔다. 한 달 전 호남은 국민의당이었다. 이제 호남은 더민주당의 땅이다. 그는 지금 당권도 잡았고, 개혁도 잡았고, 여론도 잡았다.
물론 최종 평가는 이르다. 선거 평가는 언제나 소급(遡及)적이었다. 이기면 잘한 게 됐고, 지면 못한 게 됐다. 김종인 대표도 그렇게 평가될 것이다. 4월 14일 아침에야 최종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이란 형용사를 붙여 평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김종인 대표가 더 잘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새누리당보다 화끈하게 개혁하는 것 같고, ‘지금까지는’ 국민의당보다 확실하게 호남을 얻는 것 같다.
그 속에서 김종인만의 무기가 보인다. 전라도 출신-많은 이들에게 정치성장의 한계라 여겨졌던-이 하나고, 황혼의 늙음-많은 이들에게 사회참여의 한계라 여겨졌던-이 다른 하나다. 역(逆)에서 권력(權力)을 만들어내는 김종인 대표. 그에게서 고수(高手)의 향이 풍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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