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새 봄, 새 글판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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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부서질까봐

조심조심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새 봄을 맞아 서울의 ‘광화문 글판’이 봄 옷으로 갈아 입었다. 멋진 글귀는 최하림 시인의 ‘봄’에서 가져왔다. 최 시인은 1987년에 펴낸 시집 <겨울 깊은 물소리> 가운데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두 추워서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공기조각들이 부서져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 얼음이 깨지고 버들개지들이 보오얗게 움터올랐다.

 

나는 다시 왜 이렇게 봄이 빨리 오지라고 이번에는 지넌번 일이 조금 마음 쓰여서 외치고 싶었으나 봄이 부서질까 보아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이번 광화문 글판의 글은 모든 것이 귀하고 소중하므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헤아리고 배려하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상처를 주는 날 선 말보다 서로를 보듬어 주는 따뜻함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키자는 것이다. 글판의 디자인은 눈을 가리고 봄을 속삭이는 수줍은 소녀의 모습을 통해 다가오는 봄에 대한 설렘을 표현했다.

 

1년전 광화문 글판엔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이라고 새겼었다. 함민복 시인의 ‘마흔번째 봄’의 일부다. 글판 속의 봄을 읽다보면 봄의 설렘이 느껴진다. 봄의 울렁거림과 두근거림도 전해져온다.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수원희망글판’도 새 옷으로 단장했다. 글귀는 정호승 시인의 ‘꽃을 보려면’에서 발췌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수원희망글판은 광화문 글판을 본따 만들었다. 2012년 10월부터 시작해 계절마다 새로운 글귀를 시민공모를 통해 선정하고 있다. 짧은 글이지만 각박한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여유와 희망을 준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 거리에서 만나는 글귀가 작은 위로가 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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