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1762년에 태어났다. 당시 조선 사회는 농경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변하고 있었다. 농경 사회의 사상적 지주였던 성리학이 시대사상으로의 역할을 다해가고 있었다. 대신 상공업 사회에 부응하는 기술 문명과 부국강병을 중시하는 북학 사상이 새로운 사조로 등장했다. 다산도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으며 이런 실학에 뜻을 키웠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철학적 기초는 결국 18세기가 만들어 낸 시대정신이었다. ▶1783년 과거에 합격했다. 그 해 나이 22세였다. 1789년에는 초계문신에 뽑혔다. 31세에 화성(華城)을 설계하며 수원과 연(緣)을 맺었다. 거중기, 녹로 등을 고안해 축성(築城) 기간을 앞당겼다. 33세에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파견됐다. 경기 지역 민초들의 어려움을 낱낱이 파헤쳤다. 이후 동부승지, 곡산부사에 제수됐다. 1800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여유당(與猶堂)에 터 잡았다. 공직에 나선지 꼭 18년 되던 해다. ▶바로 그해 정조가 승하했다. 다산에 대한 정적들의 탄핵이 시작됐다. 책롱사건(籠事件)이 발생했고 다산 3형제가 체포됐다. 셋째형 약종은 사형당했고 둘째형 약전과 다산은 흑산도와 강진에 유배됐다. 1816년에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약전마저 사망했다. 그가 해배(解配)된 것은 57세 되던 1818년이다. 경세유포,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그 기간에 완성됐다. 다산학이 완성된 고귀한 유배. 그 유배의 시간도 18년이었다. ▶그리고 18년 뒤인 1836년, 생을 마감했다. 180년 전이다. 남양주에서 다산 서제 180주년 추모제향을 치른다. 남양주 시민들이 다산의 사당인 문도사(文度祠)에서 잔을 올린다. 그의 고향 마재마을 주민들이 행사를 준비했다. 정악공연-흩뿌리는 풍류-도 있고, 특별강연-다산의 꿈-도 있다. 다산 시화전, 다도체험 프로그램도 다채롭다. 이강석 남양주시 부시장은 “이번 행사는 다산을 역사 속 인물에서 우리 시대가 본받아야 할 큰 스승으로 모시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한다. ▶18세기 탄생, 18년간의 공직, 18년간의 유배, 18년간의 여생, 그리고 180번째 추모제향…. 작위적인 획정이라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행사의 본뜻은 ‘18’이란 숫자가 아니라 ‘위대한 다산 정신’에 있다. 조선을 한 단계 높여놨던 정치가이자 과학자에 대한 추모다. 180년 지난 이 시대에도 다시 보길 원하는 진정한 ‘공복(公僕)’에 대한 소망이다. 화성을 선물 받은 수원시민, 암행어사로 보호받던 경기도민 모두가 찾아야 할 ‘다산 서제 180주년 추모제향’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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