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 1번 이회창(한나라당), 기호 2번 김대중(국민회의), 기호 3번 이인제(국민신당). 1997년 15대 대선에 나선 세 후보다. 관심은 단연 이인제 후보였다. YS(김영삼)로부터 ‘40대 깜짝 놀랄 후보’로 점지 된 터였다. 정치적 성향은 당연히 여권이었다. 이회창 후보에는 치명적인 감표(減票) 요인이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치 기자들 사이에 소문이 나돌았다. 보수 성향의 신문이 선거 전날 뿌려댈 기사였다. 기자들이 예상한 기사 제목은 ‘이회창 김대중으로 승부 압축’ 또는 ‘이회창 김대중 양강 구도’였다. ▶1997년 12월 16일 밤. 조선일보 사옥이 일단의 시위대에게 에워 싸였다.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는 국민신당 당원들이었다. 신문발송 차량의 출입을 막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선일보를 불태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막 제작이 끝난 17일 자 신문의 1면 기사를 삭제하라는 요구였다. 기사 제목은 ‘이회창-김대중 선두 각축’이었다. 정치 기자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선거일 하루 전날이라는 날짜가 맞았고, ‘이회창-김대중 선두’라는 제목이 맞았다. 신문은 배포됐고 국민신당은 17일 하루에만 7, 8건의 관련 논평을 뿌렸다. ▶대선 역사에 기록된 가장 극렬했던 ‘사표 공방’이다.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공식이었다.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이 선거일까지 외쳤던 구호다. 결과는 그대로였다.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였다. 1.3%p 차이로 대통령이 결정됐다. 여권 성향의 19.2%(이인제)가 결정적이었다. 이 19.2%의 표는 한국 정치사에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최초의 정권교체, 최초의 호남 정권, 최초의 진보 정권의 바탕이 됐다. 19.2%는 사표가 아니었다. 역대 대선에서 가장 의미가 큰 표로 기록됐다. ▶4ㆍ13 총선 투표용지가 인쇄됐다. 야권 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연대가 성사되더라도 이제 투표용지에는 표시될 수 없다. 투표용지 위에서의 ‘일여다야(一與多野)’는 기정사실이 됐다. 다급한 건 더불어민주당이다. ‘사표 심리’ 작전이 시작됐다. ‘국민의당을 찍으면 새누리당이 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정치 구조상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역시 유권자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국민의당의 미래를 보겠다’는 유권자엔 생표(生票)가 될 것이고, ‘새누리당에 이득 줄 수 없다’는 유권자엔 사표(死票)가 될 것이다. 정치가 함부로 단정할 일이 아니다. 20여년전 한나라당의 사표 작전은 실패했다. 유권자의 선택을 멋대로 단정 지었던 탓이다. 더민주당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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