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1820년경∼1913년)이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밀어내고 20달러 지폐 앞면을 차지한다는 소식이다. 흑인이 미국 화폐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처음이다. 미 재무부는 지난달 20일(현지시간) 터브먼과 함께 10달러 지폐에는 수전 앤서니와 엘리자베스 스탠턴 등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의 모습을 넣을 것이라고 밝혔다. 확정된 지폐 도안은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한지 100주년이 되는 2020년에 발표될 예정이다.
세계 각국의 지폐에 여풍(女風)이 거세다. 영국, 캐나다 등도 새로 발행될 지폐의 얼굴로 여성 인권운동가나 작가, 과학자 등을 선택했다.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새로 발행될 5파운드 지폐의 모델로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겸 시인 낸 셰퍼드(1893∼1981)를 선정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파운드화를 쓰지만, RBS와 스코틀랜드은행, 클라이즈데일은행 등 3곳에서 자체 지폐를 발행할 수 있다. RBS는 지난 2월엔 투표를 통해 내년에 발행될 10파운드 지폐의 모델로 과학자 메리 서머빌(1780∼1872)을 선택했다. 낸 셰퍼드와 메리 서머빌은 영국 여왕을 제외하고 RBS의 지폐에 등장하는 첫 여성이 된다.
영국은행도 2017년부터 10파운드 지폐 모델을 찰스 다윈에서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으로 바꾸기로 했다. 캐나다도 2018년 발행될 신권에 처음으로 여성 인물을 넣기로 하고 국민 공모에 들어갔다. 세계 최초의 여성 항공기 디자이너인 엘시 맥길, 첫 여성의원 애그니스 맥파일, 원주민 출신 여성 운동가 섀넌 쿠스타친 등이 거론된다.
우리나라는 2009년부터 발행된 5만원권 지폐에 첫 여성 인물인 신사임당의 초상을 넣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선 2004년부터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요(1872∼1896)의 초상을 5천엔 지폐에 넣었다.
각 나라의 화폐에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담긴다. 수많은 위인들 중 어떤 인물을 넣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요인은 변화하는 시대상과 가치관이다. 지폐 모델에 여성 바람이 거센 것은 그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가 재편되고 있다는 의미다. 제인 오스틴의 선정을 앞두고 영국 여성의원들은 영국은행 총재에게 화폐 발행의 성 불평등 해소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양성 평등과 여권 신장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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