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김구 선생의 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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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부친 김순영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정도였지만, 기골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였다.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포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그래서 못된 양반들을 혼내주느라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서 인근의 백성들이 다 그를 존경하였다.

 

김순영이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김구 선생이 25세 때인 1900년 12월이었다. 을미사변에 대한 민족적 울분을 대신하여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하고 인천 감리서에 수감 중이던 김구가 파옥을 하고 해주 텃골 집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그러나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고명한 의사를 부른다거나 기사회생의 명약을 드시게 하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자, 김구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구워드리기로 결심한다. 이는 과거에 위독한 할머님을 위해서 부친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할머님 입에 넣어드렸던 일을 본받은 것이다.

 

어머님의 상심을 우려한 김구는 어머님이 안 계실 때 몰래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 불에 구워서 아버님께 올리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양이 적은 듯하여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다시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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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부친이 돌아가신 후, 독신 상주라 상청(喪廳)을 비울 수 없었던 김구는 다리 살을 썰어만 놓고 떼어내지도 못해 고통이 심했지만 어머님께 말하지 않았다. 설한풍에 뼈가 시리고, 조문 받는 것조차 괴로웠지만,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고 하면서 탄식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내리사랑’은 본능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는 ‘치사랑’은 당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어서 교육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는 부모는 흔해도, 부모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자식이 드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구가 보여준 효행은 비록 부친의 효심을 본받은 것이었을망정 부모에 대한 진한 본능적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가정의 달 5월을 보내면서,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지,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일이다.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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