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신인류 ‘○○충(蟲)’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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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물스러운 벌레가 돼 있음을 깨달았다. 등딱지는 딱딱했고, 누운 자세에서 조금만 고개를 든다면 곤충처럼 올록볼록 솟아있는 자신의 갈색 배도 볼 수 있을 터였다. 몸집에 비해 처량할 정도로 얇은 다리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첫 대목이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침대에서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하게 된다.

 

소설 중 ‘눈 감았다 뜨니 벌레가 돼있더라’는 내용은, 요즘 한국 사회와 꼭 닮아있다. ‘맘충’ ‘한남충’ ‘급식충’ ‘노인충’ ‘진지충’ 등 인터넷과 SNS엔 온갖 벌레들이 득시글거린다. 대한민국에 등장한 신(新)인류 ‘○○충’은 멀쩡한 단어에 벌레라는 의미의 충(蟲)을 붙여 대상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예전에도 ‘책벌레’라는게 있었지만 개념이 다르다. 이때 벌레는 ‘덕후’의 의미가 강했는데, 요즘 ‘충’의 의미는 비하와 경멸, 차별의 의미로 쓰인다. ‘맘충’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mom)를 벌레에 비유한 것으로 ‘자신의 아이만 아는 몰지각한 엄마’를 칭한다. 식당이나 극장 등에서 냄새나는 기저귀를 갈고 테이블 위나 통로에 놓고 나가는 엄마, 커피숍 한 가운데서 컵으로 아이 오줌을 받는 엄마, 카페에서 아이들이 시끄러워도 수수방관하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 엄마, 아이가 공공기물을 파손하자 몰래 도망치는 엄마 등 맘충의 사례는 많다.

 

‘가부장적이고 여성을 배려할 줄 모르는 한국 남성’을 뜻하는 ‘한남충’도 혐오의 대상이다. ‘맘충’은 주로 남성이, ‘한남충’은 주로 여성이 사용하며 서로를 벌레로 여길 만큼 남녀갈등의 심각성을 보이고 있다. ‘설명충(모든 일을 설명하려드는 사람, 잘난척 하는 사람)’, ‘진지충(매사에 진지한 사람)’처럼 특정 성향의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노인충(또는 틀니충)’, ‘급식충’처럼 사회약자를 대상으로도 한다.

 

혐오 용어는 처음엔 일부 누리꾼의 장난처럼 인식됐지만 최근엔 비하 대상이 되는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처럼 사용되면서 사회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언어에는 그 사회의 모습과 의식이 투영돼 있다. ‘○○충’의 유행은 요즘 세대, 특히 젊은 세대가 혐오 수준을 넘어 분노가 심하다는 반증이다. 남에게 ‘벌레 충’ 자를 붙이며 키득대는 모습은 척박한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자 사회병리현상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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