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유신(維新) 가정방문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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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써도 돼.” 칠순을 바라보는 노(老) 교육자다. 학교를 떠난 지도 오래다. 요즘 낙은 가끔 갖게 되는 제자들과의 자리다. 그가 용인 고기초등학교 제자들과 만났다. 1학급에 전부인 아주 작은 학교였다. 그만큼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기억이 정겹다. 40년쯤 지난 얘기지만 어제 일처럼 흥미진진하다. 그중에도 독재 시절 학교 비화가 단연 인기다. 점심때마다 달려야 했던 ‘국방 체력’, 권력 실세가 학교 주변에서 했던 땅 투기 등이 이어진다. ▶그런 조태우 선생도 잠시 망설인 끝에 하는 얘기가 있다. “산골 마을을 모조리 가정 방문해야 했던 일이 있었지.” 그가 말한 산골 마을은 지금도 외진 마을이다. 당시엔 10여 가구가 드문드문 있었다. 그곳을 찾은 조선생을 기다린 건 ‘담근 술’이었다. “모처럼 선생님 왔다고 내어오는 담근 술에 만취가 됐었어.” 이어 그때는 말도 꺼내지 못했던 가정 방문의 목표를 전했다. “가정을 방문해 유신-헌법-을 홍보하라는 지시가 떨어져서 간 거였어. 그런데 술만 먹고 왔지.” ▶더 흥미로운 얘기도 있다. 선생들의 가정방문을 행정 기관이 감시했다. 가정 방문 실적이 우수한 학교에는 지원금이 하달됐다. 실적이 저조한 학교에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 감시는 면(面) 서기들이 주로 했다. 영예(?)의 지원금 전달은 면장(面長)이 했다. 학교가 행정에 명줄을 맡겨 놓고 살던 시절의 얘기다. 40년 지났는데도 조선생은 반성하고 싶은 추억인 듯하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써도 돼. 내 실명 넣어도 되고.” ▶40년 뒤, 대한민국에 지방재정개혁 논란이 있다. 수원ㆍ성남ㆍ용인ㆍ고양ㆍ화성ㆍ과천시가 반발하고 있다. 이 과정에 정부가 하는 묘한 행동들이 목격된다. ‘공무원이 정부에 반대하면 징계받는다’는 괴문서가 6개 시에 도착했다. 알고 보니 행자부가 지시해 경기도가 보낸 거였다. ‘행자부가 재정개편안에 동의하면 혜택 주겠다고 했다’는 지방의 증언이 잇따른다. 성남시청에는 수원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성남지청을 배제한 이례적 본청(本廳) 수사다. ▶40년 전 유신 가정방문은 독재 정권의 강제였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에 맞설 용기를 갖기 어려웠다. 40년 뒤 행자부 압박은 스스로 택한 방식이다. ‘지시했다’는 얘기도, ‘지시받았다’는 얘기도 없다. 몇몇 정부 책임자들의 개인적 결정인듯하다. 아마도 독재(獨裁)의 유전자가 세대를 건너뛰어 흐르는 사람들인 것 같다. 아니면,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권위적 공직관(公職觀)의 돌출일 수도 있고….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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