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각자도생(各自圖生)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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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터널이 무너졌다. 영화 ‘터널’은 무너진 터널 안에 고립된 한 남자와 그의 구조를 둘러싸고 변해가는 터널 밖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터널 안 남자가 구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버티는 동안, 그의 구조를 둘러싼 터널 밖의 상황은 오늘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특종ㆍ단독 보도에 혈안이 된 언론과 부실공사로 물의를 일으킨 시공업체, 그리고 구조는 뒷전인 채 윗선에 보고하기 급급한 정부 고위 관계자들까지 현 세태를 리얼하게 풍자한다. 제대로 된 대처 매뉴얼 없이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터널 밖 사람들의 모습은 터널 안에서 생사를 다투는 남자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관객의 분노를 일으킨다.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이 영화를 보며 관객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얘기했다. 대한민국에서 개인의 생계와 안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면서. ‘각자가 살아나갈 방법을 모색한다’는 뜻의 각자도생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사회의 키워드처럼 자리잡았다.

지난 12일 경주에서 규모 5.8의 강진이 일어난데 이어 400건이 넘는 여진이 계속되면서 국민들은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진공포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데 대피요령 등을 안내해야 하는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먹통’이고, 긴급재난문자 역시 늑장 발송으로 ‘뒷북’이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매뉴얼도, 골든타임도, 사후대책도 없는 정부의 ‘3무(無)대책’을 질타했다. 지진에 우왕좌왕하는 정부 대응에 실망하고 불안감을 느낀 시민들이 ‘생존배낭’을 꾸리며 각자 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삐걱거리는 국가 재난 컨트롤타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온라인몰에선 생존배낭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생존배낭은 재난재해시 구조를 기다리며 72시간을 버틸 수 있는 물품을 담은 비상배낭이다. 생수와 라면, 참치통조림, 초코바 등 비상식량과 활동복, 담요, 응급약품, 손전등, 호루라기 등 생존도구가 담긴다. SNS엔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이란 제목으로 국민안전처보다 훨씬 자세한 내용의 생존배낭 꾸리기 요령이 올라와 있다. 일본에서 만든 지진 어플 ‘유레쿠루 콜(Yurekuru call)’도 기상청보다 믿을만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다.

긴급재난 발생시 국민들이 경각심을 갖고 비상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부를 믿을 수 없어 ‘각자도생’이라니 씁쓸한 생존 전략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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