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220년간 못 볼 수도…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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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능행차 완벽 재현 -

뜨거운 늦여름에 시작했다. 연습장은 학교 운동장이었다. 모래 섞인 마사토가 지열을 토해냈다. 간혹 쓰러지는 학생도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재미있어 했다. 역할을 정할 때 특히 그랬다. 정조대왕 역은 역대로 ‘가장 잘생긴 학생’이라고 인정됐다. 궁녀(宮女) 역의 학생들은 요즘 표현으로 ‘최고의 꽃미남’이었다. 나머지 500여명에게도 역할은 있었다. 지금이었다면 ‘학생 동원 중단하라’며 들고 일어날 일. 그게 80년대 ‘정조대왕 능행차’였다. ▶수원의 수성고등학교가 행사를 도맡았다. 당시 유일한 공립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관(官)이 동원하기 좋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였다. 불만도 많았다. 시민들 앞을 지나며 느낀 부끄러움이 있었고, 금쪽같은 시간을 빼앗겨야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위대한 역사의 재현이라는 소명감은 너무 먼 얘기였다. 30년쯤 흐른 뒤, 그 일이 역사를 잇는 끈이었음은 비로소 알게 됐다. 그 행사가 올해로 53회째를 맞는 화성문화제-당시 화홍문화제-다. ▶지난 9월 23일 수원시청에서 특별한 협약식이 열렸다. 경기도와 수원시, 안양시, 의왕시가 참여했다. 서로의 인사말이 닮은 듯 달랐다. 안양시는 ‘안양에 온 정조’를, 의왕시는 ‘의왕에 온 정조’를 말했다. 앞서 서울시, 금천구도 같은 협약식을 했다. 역시 서울은 ‘서울에서 출발한 정조’를, 금천구는 ‘금천구에 온 정조’를 말했다. 정조대왕능행차라는 단일 행사에 서울, 금천, 안양, 의왕, 수원이 이렇게 뭉쳤다. 화성문화제 53년 만에 처음으로 선 뵈는 탈(脫) 수원 문화제다. ▶처음 재현되는 모습도 많다. 창덕궁 출궁 의식, 한강 배다리, 지역별 정조 맞이, 백성의 현장 상소, 무사들의 격쟁 시범 등이 처음으로 이어진다. 한강 배다리는 군(軍)이 지원하면서 가능해졌다. 교통난은 지자체와 경찰이 나서면서 풀렸다. 전체 행렬 구간 47.6㎞, 총 참여 인원 3천69명, 동원되는 말만 408필이다. 을묘원행정리의궤로만 남았던 모습이 220년만에 눈앞에 현시(顯示) 되는 것이다. ▶최초의 지자체간 협력 능행차라 해도 좋다. 최초의 군민(軍民) 합동 능행차라 해도 좋다. 어떤 곳에 의미를 두든 모아지는 결론은 하나다. 220년만에 처음 보여지는 행사다. 그래서 220년간 볼 수 없는 행사일 수 있다는 불안감도 커지는 행사다. 역사의 끈은 끊어지게 마련이고, 끊어진 끈은 언젠간 연결되게 마련이다. 그 연결됨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시대를 살아가는 행복일 것이다. 설렘으로 기다려지는 주말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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