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자기소개서의 비애

정규직이란 친구가 지금 취업 면접 중이다.

 

“규직씨! 자신을 한 번 소개해보겠어요?” “아! 네! 저는 제출한 자기소개서대로 ~한 부모님의 맏이로 태어나 학교는 ~를 졸업했구요. 학창시절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경험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상상한 대로, 상투적이며 상식적이다. 당연히 다음 질문이 와야 하는데 이 면접관이 좀 요상하다.

 

“제가 궁금한 건 ‘당신이 지금까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지’ 입니다. 경험 말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사람들은 태어나 경험한 것들을 자신이라 믿고 산다. 그런데 경험은 지식, 감정, 그리고 욕망을 낳는다. 지정의, 그것을 우린 마음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의 마음’을 ‘나’라고 믿는다.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몰라’ 한숨 쉰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본능적인 욕망이 있다. “나 배고파!” “나 졸려!” “나 응아!” 여기 ‘나’는 정확히 나의 몸이다. 우리는 몸으로 많은 경험을 한다. 피자를 먹고, 소주를 들이키고, 에르메스를 보고, 람보르기니를 타본다.

CEO나 정치가를 보며 돈, 권력, 명예의 맛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말한다. “나 에르메스 갖고 싶어!” “나 람보르기니 타고 싶어” “나 무조건 성공할거야!” 여기 ‘나’는 내가 아닌 ‘나의 마음’, ‘경험의 집합’이다.

 

두 사람이 맞선을 본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상대를 알아간다! 이 때 서로가 내놓는 ‘나’는 마음가운데 상대가 혹할 만한 좋은 것만을 선별하여 부풀린 반면, 나쁜 것은 감추고 위장한 폼 나는 ‘자기소개서’이다. 이것을 사회적 자아(Ego)라 부른다. 당연히 에고는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나의 몸’도 ‘나의 마음(Ego)’도 ‘나(Self)’는 아니다. ‘나’는 어디 있을까?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이다. 그런데 서로의 몸과 마음만 있으니, 기다림은 이제 내가 너에게로 가도 해소되지 않는다. 10월의 마지막 밤도 지났건만, 기다리는 ‘누구’를 모르니 함께 있어도 둘은 늘 외롭다.

 

같은 공간에 있음이 만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밤새 노래방에서 소리 지르고 술을 퍼마셔도, 심지어 두 남녀가 결혼해 수 십 년을 해로해도 만남이 아닐 수 있다. 그건 오래 이혼하지 않고 버텨내기도, 한 이불 덮고 자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남은 그냥 나와 너의 만남이다. 단순하다. 참 쉽다. 그래서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렵다.

 

김봉규 미래행복인재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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