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집단 우울증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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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낸 줄 알았는데 복채를 내고 있었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비탄과 허탈함을 국민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설마 했던 최순실의 국정 농단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나자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까지 대규모 촛불집회에 나섰다.

 

대통령의 뒤에 숨어 국정을 농단해온 한 정체불명의 여인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 분노와 허탈감, 무기력증에 빠졌다. TV에서 반복돼 나오는 ‘최순실 국정 농단’ 보도를 볼 때마다 속에서 뭔가 치밀어올라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진다. 

시간이 갈수록 비리가 쏟아지고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허탈감을 느낀다. 믿었던 사람한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아 배신감을 느낀다. 홧김에 자꾸 술을 먹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를 ‘집단 우울증’으로 진단했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한을 ‘비선 실세’인 최순실이 휘둘렀고, 국민의 세금과 각종 이권사업도 최순실의 먹잇감이 됐다. 대기업들은 그녀에게 돈을 싸들고 줄을 대기 바빴다. 국민들은 ‘도대체 이 여자가 뭐길래?’하며 믿기지 않는 상황에 집단 패닉에 빠졌다.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다.

 

최순실 사태로 ‘순실증’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최씨 일가의 국정 농단과 함께 축적 과정이 불명확한 재산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상실감과 무력감은 더욱 커졌다. 검찰에 소환되던 날, 최씨의 명품 신발과 가방이 종일 SNS를 달궜던 것도 ‘순실증’과 무관치 않다.

 

“어렵게 취업해 생활하고 있는데 ‘돈도 실력이다. 부모를 원망하라’는 정유라의 말을 생각하면 열심히 일해 뭐하나 하는 좌절에 빠진다”는 직장인의 고백이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몇 년간 공부했는데 이제는 책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공시족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믿고 수십 년간 지지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려고 지지했나 하는 생각에 잠이 안온다”는 노인도 있다. 많은 국민이 허탈함을 표출하고, 청년층은 원칙이 무너진 사회를 빗대 ‘이게 나라냐’며 울분을 터트리고 있다.

 

2년 전 세월호 참사 때도 우리 국민은 집단 우울증에 시달렸다. 집단 우울증은 국민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가 다시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포함해 성역 없는 수사를 해서 관련자를 엄정하게 처벌,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 상처받은 국민을 위한 최소한의 위로이자 치유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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