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유명한 의료계 사건이었다. 명문대 출신의 병원장이 기소됐다. 호화 증인단이 법정을 장악했다. 복잡한 의학적 변론에 검찰이 고전을 거듭했다. 그때 단 한 명의 증인이 끝까지 검찰 측 주장을 지원했다. 경영과 진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간호사였다. 병원장 유무죄에 가장 큰 비중이 있던 증인이었다. 그 간호사는 검사가 묻는 말에 처음부터 끝까지 “맞습니다”로 일관했다. ▶검찰 주변에서 소문이 돌았다. 간호사와 병원장의 ‘관계’였다. 평소에도 동료 간호사들 사이에 둘의 관계는 ‘뒷담화’의 대상이었다. 취재 기자들도 그런 뒷담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검사가 둘의 관계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공소장에는 넣지 않았다. 간호사를 압박하는 용도로 썼다. 간호사가 검찰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 결국 병원장은 유죄가 됐고 병원은 문을 닫았다. ▶‘서랍 속 공소장’이란 말이 있다. 서랍이란 ‘검사 책상 서랍’을, 공소장이란 ‘숨겨진 비리’를 말한다. 당사자들에겐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 무엇’이 불법인 경우도 있지만, 부도덕인 경우가 더 많다. 그 사건에서 검사가 쥐고 있던 ‘서랍 속 공소장’도 불륜이었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중론이었다. ▶‘정호성 녹음 파일’이 관심을 끌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결정적 범죄 증거가 포함됐다는 얘기도 있고, 국정 무능의 실상이 포함됐다는 얘기도 있다. 대통령이 최순실을 ‘선생님’이라 불렀고, 최순실은 대통령에게 ‘지시’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내용은 이미 찌라시로 돌았다. 국민 서너명만 모이면 이 얘기를 했다. ▶여기엔 검찰발(發)로 포장된 언론 보도도 한몫했다. 어느 방송사는 통화 내용이 10초만 공개돼도 촛불이 횃불 될 것이라고 했다. 어느 신문은 통화 내용을 들은 검사들이 대통령의 무능함에 분노했다고도 썼다. 모두 익명의 검찰 관계자를 출처라고 소개했다. 급기야 언론 보도는 통화 내용의 공개 시기를 점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현직 검사 A는 ‘미친 소리’라고 일갈했다. 검찰에게 현행법-형법 126조 피의사실공포죄-을 위반하는 범죄자가 되라는 얘기라고 했다. 특별수사본부도 진화에 나섰다. 항간의 떠도는 통화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정호성 녹음 파일’이 회자된 지 이미 4, 5일이 지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 번 방향을 튼 여론은 되돌아가지 않았다. 앞서의 찌라시와 검찰발 보도가 진실일 거라고 모두가 믿었다. ▶이러면서 ‘정호성 녹음 파일’은 박 대통령 사건의 ‘서랍 속 공소장’이 돼버렸다. 박 대통령 측을 압박하는 ‘그 무엇’이 돼버렸다. 그리고 오늘(29일), 대통령은 하야를 얘기했다. 그 옛날, ‘서랍 속 공소장’ 앞에 병원장이 병원문을 닫은 것처럼 ‘정호성 녹음 파일’ 앞에 대통령이 청와대 문을 떠나기로 했다. 역시 ‘공개된 공소장’보다 무서운 ‘서랍 속 공소장’이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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