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87체제’ 30년, 그리고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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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꼬박 30년 전인 1987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매우 뜻 깊은 한해였다. 88올림픽을 1년여 앞두었던 6월, 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6월 민주화운동’ 혹은 ‘6월 민중항쟁’으로 불리는 거국적 저항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대통령 직선제 수용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 등의 내용을 포함한 헌법 개정안이 그 해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법률 및 제도의 토대가 된 소위 ‘87체제’의 시작이다.

 

‘87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로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많은 정치 및 제도적 장치들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와 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최근 대통령 탄핵 심사로 온 국민의 초미의 관심을 받고 있는 헌법재판소가 바로 이 때의 개헌으로 신설된 헌법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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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긍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87체제’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극소수의 정치인에 의해 논의된 데서 찾을 수 있다. 6.29선언 이후, 여야는 각각 네 명의 국회의원을 선발해 ‘8인 정치회담’을 구성했는데, 이들은 첫 회의가 열린 지 불과 한 달 만에 헌법전문과 부속 조항 개정에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즉, 현재까지 30년간 이어진 ‘87체제’는 단지 여덟 명의 손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급하게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렇다 보니 개정된 새 헌법의 잉크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각양각색의 개헌 관련 문제가 정치권에서 다시 터져 나왔다. 그런데 국민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다양한 이 논의에 정작 국민은 없었다.

 

2017년 새해에도 탄핵 정국과 조기대선 분위기에 맞물려 개헌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고 있다. 개헌의 성사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우리는 민주화와 개헌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냈음에도 그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지난 1987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개헌 논의의 중심에는 그 누구보다도 국민이 있어야 할 이유다.

 

조의행 신한대학교 초빙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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