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내 기억 속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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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 발생 당시 필자는 영국에 있었다. 학위 논문을 심사를 얼마 앞두지 않았던 때였다. 배가 기울어져 있다는 인터넷 뉴스에 안심했다. 학생 전원 구출이라는 속보도 떴다. 이미 영국은 늦은 밤이라 별다른 걱정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아침 뉴스를 확인하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300명이 넘는 승객이 목숨과 함께 배가 침몰한 것이다. 영국의 언론도 속보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 후, 필자 소속 대학 총장명의의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수신인은 필자를 포함한 학내 모든 한국인 학생이었다. 총장은 이번 비극에 대해 조의를 표하며, 혹시 이번 사건으로 학생의 가족 혹은 친구의 피해가 있다면 학교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학교 당국의 세심한 관심과 책임 있는 자세에 감탄하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논문 심사 후 귀국해서 접한 한국은 웃음을 잃은 사회였다. 사람들은 표정 자체를 박탈당한 듯 보였다. 대중교통과 음식점, 심지어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대학의 공기도 무미건조했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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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세월호 피해자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마침 집안 장례를 치르고 간 화장장에서였다. 침몰 당시 사망한 선생님에 대한 화장이 바로 곁에서 진행 중이었다. 흐느끼는 유가족과 학생들을 보며 그제야 필자도 이번 사건이 갖는 무거움을 피부로 느꼈다.

 

사건 발생 몇 개월이 지나 한 워크숍에서 만난 교수는 세월호 침몰을 한국전쟁과 IMF 사태와 함께 광복 후 3대 재난으로 꼽았다. 당시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지만, 다사다난했던 지난 몇 개월을 돌이켜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살 수도 있었던 어린 학생들이 찬 바닷속에서 사라져 갈 때, 최고 국정운영자에 대한 불신(不信) 싹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싹은 현직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란 헌정사 초유의 괴물로 성장해 우리 정치를 삼켜버렸다.

 

드디어 세월호가 물 밖으로 다시 나왔다. 여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도 침몰 원인이 무엇인지 결론도 못 냈다. 엄정한 진상 규명이 곧 우리 사회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임을 잊지 말자. 더 이상 우리 정부가 영국 대학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으면 한다.

 

조의행 서울신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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