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8일. 정기국회 단상에 양복 차림의 의원이 섰다. 마이크 앞에 선 그가 시작한 연설은 반(反) 유신헌법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이어지던 관제(管制) 데모를 맹 비난했다. 베트남 공산화 이후 계속된 안보 행사였다. 정부가 전쟁심리를 조성해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써는 금기와도 같았던 유신헌법 비판이었다. 연설은 여권인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의 야유로 중단됐다. 속기록도 다 삭제됐다. ▶정일권 국회의장은 징계안을 회부했다.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국회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이적(利敵)행위였다는 이유였다. 의원제명이 결정됐고 여야의 대치가 계속됐다. 이때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당을 위해 사퇴하라’고 권고했다. 소속 의원을 보호하는 대신 출당을 명한 것이다. ‘김옥선 파동’이다. 그 남장(男裝) 국회의원은 김옥선(83)이었다. 김영삼 총재에게는 여성 단체가 보낸 면도칼이 배달됐다. 면도칼이 상징하는 바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남장 여성 의원’ 김옥선의 도전은 계속됐다. 10년간의 공민권 박탈이 끝나자 대통령에도 도전했다. ‘3김’(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으로 상징되는 남성 정치판에서 여성 정치인의 도전은 그렇게 외로웠다. 그리고 30여 년, 세상이 달라졌다. 여성 공천 비율이 당헌으로 보장되는 시대다. 여성 당대표의 당무 수행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여성 대통령 밑에 남성 총리가 일상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이제 ‘결혼 안 한 남장 여성 정치인 김옥선’의 얘기는 흑백 화면 속 ‘대한 늬우스’로만 남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경화씨를 최초의 여성 외교부 장관에 지명했다. 그런데 잡음이 많다. 자녀의 이중 국적,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등등이다. 오늘부터 시작될 청문회에서 야당은 독하게 물고 늘어질 태세다. ‘반드시 낙마시키겠다’며 벼르고 있다. 청와대와 여권은 ‘비고시 출신의 능력자’라며 임명을 강행할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얘기가 나온다. ‘강 후보자 낙마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런가. 강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 제기가 여성이기 때문에 제기되는 공세인가. 그렇다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지명자의 경우가 설명 안 된다. 국토교통부 장관에 여성이 지명된 것도 최초다. 외교부 못지않게 금녀의 벽이 높던 곳이다. 그런데 지명 일주일이 되도록 김 지명자에 대한 의혹은 한 건도 없다. 위장 전입 논란도, 부동산 투기 논란도, 이중국적 논란도 없다. 여성 편견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편견은 아닐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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