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이제야 밝힌다’고 하나. 2013년 3월 21일 오전. 대법원 기획조정실장 ‘임 판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새벽에 보도된 내 칼럼 관련해서다. “김 실장님, 내가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셔서 언론에서 확인 전화가 오고 그럽니다.” 사실 그랬다. 그가 말한 것은 “영통에 기재부 땅 있지요?”였다. 그걸 ‘우리가 영통 기재부 땅을 보고 있다’고 썼다. 엄밀히 말해 ‘임 판사’의 항의는 옳았다. ▶그때 경기고법은 수년째 답보였다. 대법원의 미온적 태도가 특히 벽이었다. 그 해 그 달 13일, 대법원장 초청 방송 토론회가 있었다. 패널로 참가해 의견을 물었지만, 원론적 답변만 들었다. 이어진 오찬장의 옆자리가 ‘임 판사’였다. 여러 얘기 중 그가 한 말이 “영통에 기재부 땅 있지요?”였다. ‘이거다’ 싶었다. 기억에 담아뒀고 그 칼럼을 썼다. 2천 자 칼럼 중 필요한 부분은 그 한 마디였다. ‘대법원이 경기고법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전달하고 싶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임 판사’가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전화가 없었다. 언론은 ‘칼럼’의 진위를 파악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사실무근’이라는 대법원 답변을 예상하고 있었을 수 있다. 경기고법에 대한 대법원의 태도가 그때까지는 그랬다. 늦은 오후, 연합뉴스에서 대법원 발 속보가 떴다. ‘대법원이 경기고법 부지로 영통 기재부 땅을 검토하고 있다고 확인했다’는 기사였다. 그날-2013년 3월21일-부터 수원고법 역사는 급물살을 탔다. ▶대법원이 ‘그렇게 말한 적 없다’거나 ‘검토한 사실 없다’고 잡아뗐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영통 땅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격 발표했다. 여기에 양승태 대법원장의 결단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발표의 파괴력을 알면서도 그가 내린 결단이었다. 수원고법 설치의 1등 공신은 많다. 저마다 ‘내가 해냈다’며 공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승태 대법원장의 공(功)은 알려지지 않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요즘 위기를 맞고 있다. 법원 행정처 간부들의 사법 권한 남용 논란이 불거졌다. 일부 판사들은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양승태씨’라는 막말을 퍼붓는 익명의 판사도 있다. 남은 임기 3개월이 불투명하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이래저래 그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경기도민의 숙원이던 수원고법 설치에 더 없이 힘을 보탰던 그다. 그의 ‘수원고법 일화’를 늦기전에 소개해두는 이유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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