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대통령의 휴가와 책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서광으로 유명했다. 개인 서고에 3만여권의 책을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된 뒤 여름휴가 때면 그의 도서 목록이 공개됐다. 2000년 여름휴가 때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지식 경영자’ ‘해리포터’ 1ㆍ2ㆍ3권을 포함해 10여권을 독파했다고 공개됐다. 그가 재임 기간 중 읽었다고 전해지는 휴가 도서 목록은 매번 출판 업계의 관심을 끌었다. 정치권에는 휴가 후 정국을 가늠케 하는 잣대로 해석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 사랑도 대단했다. 여름휴가를 따로 떠나지 않고 관저에서 온종일 책을 읽기도 했다. 취임 첫 여름휴가였던 2003년에는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주 5일 트랜드’ 등이 도서 목록으로 공개됐다. 탄핵 당시 직무 정지 기간에도 ‘칼의 노래’ ‘마거릿 대처’ ‘이제는 지역이다’를 정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책적 패러다임이나 정치 이상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다수 포함됐다. ▶청와대가 대통령의 휴가 도서 목록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 때다. 1996년 정무수석실이 대통령이 휴가 중 읽었다며 5권을 추천했다. ‘21세기 예측’ ‘미래의 결단’ ‘동아시아의 전통과 변용’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등이다. 제목에서부터 정치적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과거 청산’ ‘세계화’ 등을 정책 목표로 했던 문민정부의 색채가 그대로 배어 있다. 추천 도서라기보다 책 제목 자체가 전하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대통령의 휴가 도서 목록이 화제로 등장하는 역사는 미국에서 시작됐다. 1961년 한 잡지에 케네디 대통령의 애독서 10권이 소개됐다. 이게 대박이 됐다. 해당 도서 판매량이 급증하며 출판계를 기쁘게 했다. 이후 대통령의 휴가 도서 목록 공개는 백악관에도 관행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여름휴가를 떠났다. 청와대는 별도의 도서 목록을 발표하지 않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겐 이 자체가 기사였다. 휴가 도서 목록을 공개하던 관행이 깨졌다고 썼다. ▶글쎄다. 피서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휴양객을 보는 건 쉽지 않다. 산이나 바다에서 책을 읽고 있다면 어색해 보이는 게 오히려 현실이다. 그런데 대통령에게는 휴가철 독서가 당연한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공개된 책에 의미를 부여해 ‘향후 정국 구상’이라는 상상력을 풀어간다. 여러 가지 실없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통령들이 그 책을 정말 정독했을까?’ ‘비서진이 내용만 요약해 주지는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그다지 부질 있어 보이는 관행은 아닌 듯 하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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