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구천(句踐)이 오나라 부차(夫差)를 무너뜨렸다. 앞서 부차에게 패했던 구천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벼르던 승리였기에 그 기쁨은 더욱 컸다. 구천의 승리 뒤에는 범려(范)와 문종(文種)이라는 두 명의 책사가 있었다. 패권을 거머쥔 구천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범려가 문종에게 말했다. “구천은 어려울 때 같이 할 수 있는 군주지만 태평시대에 같이 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문종에게 구천 곁을 떠나자고 했다.
문종은 거절했다. 그러자 범려는 구천의 곁을 떠나면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라 했다. 가까이할 수도, 그렇다고 멀리 있을 수도 없는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범려가 떠난 후 구천은 문종에게 물었다. “네가 가지고 있던 많은 계책 가운데 몇 개만을 사용하고도 오나라를 이겼다. 그런데 아직 나머지 계책을 말하지 않고 있다”며 “그 가운데 왕위를 찬탈하려는 계책이 있지 않겠느냐”라며 자결을 명했다. 문종은 그렇게 죽었다.
이와 유사한 논리적 표현이 있다. 바로 고슴도치 딜레마다. 겨울이 되면 고슴도치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 다가가 몸을 기대고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서로의 몸을 기대자니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고, 멀리 떨어져 있자니 추위를 견뎌내지 못한다. 그야말로 불가근불가원이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중간 지대가 없는 한 고슴도치의 겨울은 혹독하다.
정부는 내년 시간당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16.4% 오른 7천530원으로 결정했다. 이는 최근 5년간 평균 인상률 7.4%의 두 배를 넘는 역대 최대 인상폭이다. 정부 방침대로 최저임금을 인상하자니 영세업자들이 고통스럽고, 그렇다고 최저임금을 동결하자니 근로자가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섬유업계 등 일부 업계가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며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나섰다. 그러자 정부는 뒤늦게 기업의 해외진출 자제와 기업의 혁신성장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업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최저임금을 놓고 불가근불가원에 대한 절묘한 중간지대를 마련해야 한다. 상생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영수 인천본사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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