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그때, 영국은 방공호 200만개를 만들었다

英, 독일 공습 예견하고 정부가 직접 만들어
대한민국, 답답한 퇴역 장교가 생존법 메일
125만 군·민 죽은 6·25 전쟁의 나라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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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이다. 세계 대전이 끝난 지 19년이다. 패전국 독일엔 어떤 기력도 없어 보였다. 모두가 그렇게 봤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달랐다. 조만간 독일의 폭탄이 날아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날아들 폭탄과 피해까지 추산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공습으로 1천413명이 죽었다. 다시 전쟁이 나면 독일은 60일간 공습할 것이다. 폭탄 1톤당 50명이 다치거나 죽는다. 최종 사상자는 200만명이 될 것이다.’ 영국 정부가 국민에게 설명한 통계다.

예상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공습을 피할 방공호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부 지시로 ‘리엄 페터슨’이 설계했다. 재료에서 재원까지 꼼꼼히 정해졌다. 14개의 아연 철판 패널을 이어 붙였다. 뒤집힌 ‘U’자형으로 높이 1.8m, 폭 1.37m다. 땅속에 1.2m를 묻고 지붕은 0.4m 두께 흙으로 덮도록 했다. 주무관서는 영국 정부 민방위대였다. 방공호 고유 형식에 민방위대 책임자의 이름이 상징으로 붙었다. ‘앤더슨 방공호’(Anderson air raid shelter)다.

가난한 국민은 별도로 배려했다. 연간 수입 250파운드 미만인 가정엔 무료로 설치했다. 여유가 있는 가정이라도 7파운드라는 값싼 가격으로 지원해줬다. 전쟁 준비에도 국민 개개인의 형편을 살핀 세심한 접근이었다. 2년 뒤, 독일의 공습이 현실화됐을 땐 이미 150만개의 앤더슨 방공호가 설치됐다. 전쟁 중에 50만개를 더 만들었다. 최대 6명이 사용할 수 있었으니 1천200만명이 대피할 공간이다. 당시 영국의 인구가 4천500만명이었다.

영국 정부의 방공호 정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앤더슨 방공호의 약점이 드러났다. 습기를 배출하지 못해 내부가 축축해졌다. 이번에는 치안 장관 ‘허버트 모리슨’이 나섰다. 아예 집 내부에 설치하는 설계를 했다. 철판 기둥과 철망 측면을 집 벽과 바닥에 볼트로 연결했다. 전쟁이 임박해 등장한 모델이었지만 그래도 50만개를 보급했다. 여기에도 장관의 이름이 붙었다. ‘모리슨 방공호’(Morrison bomb shelter)다.

2017년이다. 대한민국에도 방공호가 등장했다. ‘방공호 찌라시’라 쓰는 게 옳을 듯하다. ‘핵전쟁 생존 상식 10단계’라는 자료다. ‘환기’ ‘물’ ‘음식’ ‘위생’의 4가지를 생존 준비물로 들었다. 피신할 방공호는 그림까지 곁들여져 설명돼 있다. 그런데 그 옛날 영국과 다른 점이 있다. 정부가 아닌 개인이 만든 자료다. 육군 대령 출신의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장이 만들었다. 많은 네티즌이 관심을 보였다. 이런 댓글이 있다. ‘정부보다 낫네!’

한반도 위기가 외신(外信)을 덮은 지 한참 됐다. 그러면서 따라붙는 해설이 ‘한국인은 이상하다’다. 그럴 만하다. 북한 김정은은 ‘괌 타격’을 공언했다. 미국 트럼프는 ‘분노와 화염’으로 응대했다. 괌 주민에겐 비상 대처 요령이 뿌려졌다. 그런데 한반도 이남은 다르다. 차라리 거꾸로 가는 듯하다. ‘사드 나가라’며 미사일 방어 기지를 에워싼다. ‘군사 훈련 중단하라’며 미국 대사관에 확성기를 틀어댄다. 그 흔하던 민방위 훈련도 안 보인다.

그때, 영국이 방공호 때문에 이겼다고는 볼 수 없다. 독일을 무너뜨릴 공격 수단은 아니었다. 혼자 이겼다고도 볼 수 없다. 연합군이 거둔 전체 승리의 일부였다. 그런데도 전사(戰史)는 두 방공호를 의미 있게 기록하고 있다. 유비무환의 태세로 전쟁을 준비했다고 적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을 보호해줬다고 적고 있다. 국민이 하나 되어 정부를 믿고 따라갔다고 적고 있다. 전쟁을 대비하는 한 국가의 올바른 판단과 자세라고 적고 있다.

정부가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다가올 재난을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재난이 전쟁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국민 125만명이 죽어나간 전쟁을 경험했던 대한민국이니 말이다.

 

김종구 主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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