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20여년 만에 재개봉된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는 이탈리아 아트무비의 진수로 꼽힌다. 나폴리 인근의 작은 섬을 배경으로 한, 망명 온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이야기다.
네루다에게 오는 편지를 배달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고, 시인을 통해 성장해 가는 한 순수한 시골 청년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과 재미를 준다. 오래된 영화지만 영화음악과 함께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일 포스티노’는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원작이다.
영화 속 마리오처럼, 많은 이에게 우편배달부는 추억과 낭만을 선물하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사랑과 희망의 전령사이자 슬픔을 함께 나누는 친구이기도 했다.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아주 먼 옛날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편배달부들은 장시간 노동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이제는 집배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이들은 하루 평균 근로시간이 10.9시간에 달한다. 10명 중 4명은 하루 12~14시간, 월평균 22일을 일한다. 그렇다고 휴가를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연차휴가를 사용한 날은 평균 3.4일에 불과했다. ‘동료에게 피해 주기 싫어서’ ‘업무량이 많아서’ 못 간다는 게 집배원들의 하소연이다.(한국노동연구원 설문).
이들은 질병을 달고 산다. 둘 중 한 명은 고혈압이나 심근경색, 대사증후군 등의 진단을 받았다. 분기별로 한 번씩은 근골격계 질환이나 교통사고 등 일하다 사고를 당한다. 그런데도 병가를 안 쓰는 사람이 10명 중 8명이다. ‘내가 쉬면 다른 사람이 내 일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집배원의 하루는 오전 5~7시에 시작된다. 우편물을 분류, 배달까지 마치면 오후 3~5시. 배달을 마친 뒤에도 이들은 다음 날 돌릴 우편물을 또 분류한다. 퇴근은 밤 9시를 넘기는 게 보통이다. 선거철이나 명절 때면 전쟁을 치른다. 이들의 하루 평균 이동거리는 광역시가 40㎞ 정도다. 신도시는 60㎞, 농어촌은 100㎞ 이상이다. 하루에 1천건 넘게 배달한다.
올 들어 집배원 9명이 세상을 떠났다. 위탁택배원과 계리원을 포함하면 12명이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20~50대 남성들이 뇌출혈, 동맥경화, 심근경색, 교통사고, 자살 등으로 인생을 마감했다. 집배원들의 잇단 과로사를 더 이상 간과해선 안된다. 장시간 노동, 상시적 위험, 불안정한 고용구조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절실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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