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핵 보유國
‘진보 비핵-보수 핵무장’ 구분 틀려
이념 떼어내야 核위기 바로 보일 것
반공도 필요했고, 통일도 필요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는 서로의 단어만을 말했다. 진보가 반공을 말하면 변절자가 됐다. 보수가 통일을 말하면 범죄자가 됐다. 이를 지켜본 반공의 종주국 미국조차 웃었다. 국무성 한국과장은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훗날 대통령이 되는-는 유 의원 석방 탄원서를 냈다. 이념이 단어까지 독점하던 시절, 그때를 역사는 ‘독재’라 적었다.
그런데 요사이 그런 단어를 본다. ‘핵무장’ 또는 ‘비핵’이다. 핵무장은 보수의 단어처럼 됐다. 비핵은 진보의 단어처럼 됐다. 그러면서 서로를 공격한다. 보수는 ‘국민이 핵 인질이 됐는데 감상에 빠져 있다’며 진보를 공격한다. 진보는 ‘민족을 공멸시키는 철없는 주장이다’며 보수를 공격한다. 정치는 ‘비핵 여당’과 ‘핵무장 야당’으로 나뉘었다. 정치가 그러니 시민사회세력도 갈라섰다. 30년 전 ‘반공’ ‘통일’만큼이나 우습다.
왜 핵에 이념이 끼어드나. 핵은 눈앞의 현실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공포다. 북한 핵실험 한 번에 남한 땅이 흔들렸다. 서울이 불바다 되는 그래픽이 뿌려졌다. 하남, 김포, 과천, 의정부까지 화마(火魔)로 도색됐다. 건물들이 모조리 쓰러질 거라고 했다. 수백만명이 타죽을 거라고 했다. 놀란 사람들이 안 쓰던 지하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주방을 뒤져보며 남아 있는 라면을 헤아렸다. 이런 핵에 웬 이념인가. 차라리 사치다.
두 단어를 엮어 맬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핵보유국의 면면이란 걸 보자. 모두 여덟-북한 포함- 나라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본주의 국가다. 러시아, 중국,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비동맹국이다. 자본주의 국가 셋, 사회주의 국가 셋, 비동맹 국가 둘이다. 핵이 이념이었다면 통계가 이렇지 않았을 게다. 한쪽 진영이 없거나 적었을 게다. 하지만, 똑같다. 핵과 이념은 이렇듯 애초부터 무관한 단어였다.
전사(戰史)에 이런 불균형 대치는 없었다. 남한이 가진 최고 무기는 현무다. 축구장 세 개를 초토화 시킨다. 6천500평쯤 된다. 북한이 가진 최고 무기는 핵이다. 서울 전역을 초토화 시킨다. 1억8천만평쯤 된다. 이 불균형의 해소가 우리에겐 생존이었다. 두 길이 있었다. 양쪽 모두 핵을 버리는 길, 그리고 양쪽 모두 핵을 갖는 길이었다. 지금껏 우린 앞의 길을 기다렸다. 인내하면 대화로 가고, 대화하면 비핵화로 갈 거라 봤다.
하지만, 틀렸다. 돌아보니 애초부터 허망한 기대였다. 핵 역사만 봤어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한번 등장한 핵은 사라진 적이 없다. 유일한 핵 포기 국가로 남아공이 있는데, 모든 게 다르다. 주적(主敵) 앙골라에서 쿠바군이 철수했다. 만델라라는 평화주의자의 27년짜리 저항이 있었다. 북한은 계속 핵을 필요로 했다. 내부로부터의 어떤 저항도 없었다. 그 무모한 기대가 배신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원자탄은 오늘의 수소탄이 됐다.
작금의 핵무장론은 그래서 나왔다. 배신 당한 인내심이 토해내는 분노다. 이걸 윽박지르면 안 된다. 그냥 토론하게 둬야 한다. 핵개발이든, 전술핵이든 그냥 토론하게 둬야 한다. ‘비핵’이 어째서 당론인가. 진짜 지켜야 할 당론은 ‘국민 보호’다. 핵무장론이 왜 ‘철없는 소리’인가. 진짜 철없는 소리는 ‘진보=비핵=평화’라는 근거 없는 공식이다. 이제라도 핵에서 이념을 떼내야 한다. 그래야 모두의 눈에 ‘핵폭발’의 섬광이 보인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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