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8년(1418년) 6월6일. 아버지 태종이 신하 문귀(文貴)에게 하교했다. 세자를 폐하고 광주로 보낸 아들 양녕에게 전하는 말이다. “중궁(中宮)이 울면서 나에게 청하기를 ‘이제(李)가 어린 아이들을 거느리고 먼 지방으로 간다면 안부(安否)를 통하지 못할 것이니, 빌건대, 가까운 곳에 두소서’라고 했다. 나도 또한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무심(無心)하겠는가? 이에 군신(群臣)에게 청하여 너를 광주(廣州)에 안치(安置)하는 것이다.” ▶아들 양녕에 챙겨줄 목록까지 열거한다. “비자(婢子ㆍ노비)는 13구(口)를 거느리되,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노자(奴子)는 장차 적당히 헤아려서 다시 보내겠다. 전(殿) 안의 잡물(雜物)을 모조리 다 가지고 가도 방해될 것은 없다. 비록 후회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가 있겠는가마는, 그러나 지금 부모(父母)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좋은 이름이 들리면 좋겠다.” 실록은 ‘왕이 통곡(痛哭)하면서 목이 메었다’고 적고 있다. ▶세종 즉위년(1418년) 11월1일.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명이 또 등장한다. “상왕이 말하기를, ‘양녕의 죄는 종사(宗社)에는 관계되지 않고, 오로지 이것은 김한로(金漢老)의 한 짓이다. 그 아들은 죄가 없는데도 아버지를 따라 작은 집에 있으니, 화재(火災)가 두려우므로 내가 이를 심히 불쌍하게 여긴다…강화(江華)에 집 백여 칸을 지어 들어가 거처하게 하도록 하라.” 둘째 아들 세종이 즉위하는 경사스러운 해에도 태종은 쫓겨난 아들 양녕을 챙기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에게 양녕대군은 금기어였다. 언제든 복위하면 피바람이 불 화근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태종도 눈치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아들 챙기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들의 모든 걸 직접 챙겼고, 실록 곳곳에 기록으로 남았다. ‘양녕대군에게 은기와 주기 1벌을 보내다’(태종 18년)-‘월봉을 양녕대군에게 주도록 명하다’(태종 18년)-‘상왕이 양녕대군과 회안대군을 농사짓고 사냥하게 해 주는 것에 대해 묻다’(세종 즉위년). ▶태종은 잔인한 군주다. 공신들부터 처남까지 모두 죽였다. 하지만, 그가 어찌하지 못한 딱 한 사람, 그건 패륜아 아들 양녕이었다. 남경필 경기지사가 아들의 일탈로 또 곤경에 처했다. 군 복무 시절 비리에 이어 두 번째다. 선거에 관한 한 무패(無敗)의 신화를 써온 그다. 다섯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1번의 도지사 선거에서 모두 이겼다. 하지만, 그도 극복하지 못하는 벽이 있음을 본다. 말 잘하던 그가 이틀째 같은 말만 반복한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제대로 못 가르친 저의 불찰입니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운명은 600년 전에도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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