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깜깜이 기부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기자페이지

중학생 딸의 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구속된 ‘어금니 아빠’ 이영학(35)은 자신과 딸의 희귀병(거대백악종) 치료를 핑계로 후원금을 모금해왔다. 2005년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딸을 앞세워 거액의 후원금을 모금했고, 미국까지 건너가 인형 탈을 쓰고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씨는 ‘어금니 아빠의 행복’이라는 책까지 발간해 모금활동을 넓혔다. 사람들은 이씨의 안타까운 사연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딸의 치료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모습은 가짜였던 것 같다. 이씨는 기부금으로 외제차를 몰고 혈통견을 분양받는 등 호화생활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성매매 등 각종 범죄 혐의와 전과 18범의 전력이 있는 것도 드러났다.

선심(善心)을 악용해 후원금을 모집해 엉뚱한 곳에 쓰면서 ‘깜깜이’ 기부금 모집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기부 포비아’(Phobia·공포증)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문제는 기부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부금 모금 단체들은 ‘어금니 아빠’ 사건으로 회원 탈퇴와 모금액 감소가 일어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새희망씨앗이 결손아동 돕기로 2014년부터 모금한 128억원을 빼돌리는 사건까지 발생하며 상당수의 모금 단체들이 “후원을 취소하겠다”는 회원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기부 자체에 대한 불신과 함께 제도상 허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기부금품법)에 따르면 연간 1천만원 이상의 기부금을 받을 경우 기부금 모집ㆍ목적ㆍ목표액ㆍ사용계획서를 작성해 지방자치단체 등에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기부 총액이 연 1천만원이 넘은 상황에서 등록을 하지 않아도 적발이 되지 않는다. 인력문제 등 현실적 여건이 일일이 적발하기 어렵고, 제도보다는 양심에 기대다보니 불투명한 기부가 많기 때문이다. 이씨도 10년 넘도록 기부금 규모 및 사용내역을 공개하지 않았어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

여중생 살인이라는 흉악범죄를 계기로 이영학 기부금 유용 의혹이 불거지지 않았다면 문제의 기부금 모집은 계속됐을 것이다. 최근 SNS를 통해 이씨처럼 개인이 후원금을 모집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이 돈이 제대로 쓰이느냐다. 정작 기부금이 필요한 이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기부금 사용내역 검증 강화가 필요하다. 기부하는 사람도, 내가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올바른 기부문화 확립 및 신뢰도 향상을 위한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