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5인의 독립운동가를 호명했다. 의열단원으로 몽골의 전염병을 근절시킨 의사 이태준 선생, 간도참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선생, 무장독립단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독립군 결사대 단원이었던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과학으로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과학자 김용관 선생 등이다.
김용관 선생(1897~1967)은 대한민국 최초로 ‘과학’과 ‘발명’의 중요성을 강조, 과학기술 대중화 운동에 힘을 기울였던 과학자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과학기술 교육을 철저히 통제했다.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이 설립한 ‘관립 상공학교’를 단순 기능만 익히도록 교육하는 ‘공업전습소’로 격하했고, 1938년 이전까지 대학에 이공계 학과를 두지 못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선인 의사, 변호사는 있었으나 조선인 과학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김용관 선생은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 후 동경 구라마에고등공업학교 요업과에 다녔다. 유학중 일본의 빠른 성장이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게돼 1924년 경성공업전문학교 동기였던 현득영, 박길룡 등과 ‘발명학회’를 설립했다. 신문과 잡지에 과학과 발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연재하고 1933년 6월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과학 전문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했다.
1934년 2월28일에는 김용관 선생 주도로 31명의 인사들이 ‘진화론’의 찰스 다윈 서거일인 4월19일을 과학데이로 정했다. 과학 대중화를 위해 과학데이 같은 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 ‘다같이 손잡고 과학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분기하자!’는 그가 늘 외치는 구호였다. 그러나 1938년 5회 과학데이를 추진하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총독부에 체포돼 과학행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김용관 선생은 과학으로 우리 민족의 힘을 키우려 했던 인물이다. 과학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용관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서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이란 사유로 매번 탈락시켰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백방으로 자료를 모았지만 조선물산장려회 등은 독립운동단체로 볼 수 없는 데다 수감 기록이 없어 안된다는 게 이유였다.
최근 정부가 독립운동가 발굴ㆍ포상에 적극 나서기로 하면서 이번엔 김용관 선생도 독립운동가 지정이 유력해 보인다. 과학자이고 과학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김용관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도리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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