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조선말까지의 인천시 지형은 오늘과 달랐다. 과거에는 월미도가 섬이었지만 지금은 매립해서 직접 갈 수 있다. 매립하기 전까지 주안 염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배를 타기 위해 다리를 건너야 했다. 배다리라는 지명은 바로 배를 타기 위한 다리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최초 철도 부설구간인 경인선의 종착역은 사실 인천역이 아니라 제물포역이었다. 배다리 도원역 부근에 가보면 한국 최초의 철도 종점이었다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이곳에는 한국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인 영화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초등과정은 없어지고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만 남아 있다. 창영초등학교도 역사가 100년이 넘으며 본관은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화학교 본관 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1900년 전후에 건축된 미국감리교 여선교사 숙소가 근대 건축물로 보존되어 있다.
노래방이 없던 시절 야유회나 술좌석에서 흥얼거리던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들어섰던 배다리다. 지금은 건물만 남아 있지만 1920년대에 만들어진 인천 최초의 양조장이 있는 곳도 배다리다. 이 양조장 건물은 현재 스페이스빔이라는 문화단체가 임대해 사용하며 다양한 문화강좌나 강연회, 전시회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도 사용하고 있다.
배다리에는 아직까지 아벨서점이라는 헌책방이 남아 있다. 인천지역 학생들의 상당수가 아벨서점을 비롯한 여러 헌책방의 신세를 졌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50~60개에 달했던 많은 헌책방들이 사라지고 아벨서점을 비롯한 서너 개만이 남아 있다.
이런 배다리는 2010년 전후 홍역을 치른 적 있었다. 인천시가 도심을 관통하는 산업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세우고 도로부지에 속하는 주택들을 매입하며 철거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천지역의 문화예술단체들과 재개발을 반대하는 배다리 지역 주민들이 뭉쳐 산업도로 개설을 위한 도시계획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반대의 이유 중 하나는 배다리가 갖고 있는 삶의 역사와 문화의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당시 강력하게 뭉쳤던 주체들에 의해 중단되었던 산업도로 건설이, 2017년 다시 추진되고 있는데, 이에 반대하는 많은 문화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천막을 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경제개발이라는 구호 아래 대다수의 과거 문물들은 경제논리로 부정당했고, 화려한 현대문물만이 절대 진리인양 우리에게 강요되었다.
인천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근대문명의 자산들이 경제논리로 철거당하며 과거부터 이어져 온 우리 삶의 기억과 흔적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기억과 흔적이 일방적으로 소거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배다리의 진행 상황을 주시한다. 과거의 기억과 삶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배다리의 풍경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곽경전 부평구문화재단 기획경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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